디자인을 할 때 글자의 크기나 위치를 0.1포인트 단위로 조정하는 것이 지나치게 섬세한 일은 아니다. 직업 디자이너들은 늘 하는 일이다.
보통 글자의 배경은 흰색이다. 컴퓨터 화면에서 볼 수 있는 흰색은 RGB(255,255,255) 하나뿐이지만 실제 인쇄물에 쓰이는 흰색 종이는 아주 다양하다.
코팅이 되어 반짝거리는 종이, 달걀 껍데기처럼 살짝 우툴두툴한 질감을 가진 종이, 얇아서 하늘거리는 종이, 넘길 때 긴장감이 느껴지는 팽팽한 종이, 석고 같은 질감의 종이, 백색의 기준이 되는 탄산마그네슘보다 새하얀 순백의 특수한 종이 등.
디자이너들은 머릿속으로 이 여러 흰색 종이 중에서 몇 개를 골라 그 위에 글자를 조합하고 최종 작업물을 상상하고 가늠해 본다. 글자가 가진 뜻이나 모양에 따라서 작업의 콘셉트도 달라진다. 페이지를 넘길 때 앞 뒤의 문장과 단어에 따라서 디자인이 바뀐다.
어떨 때 흰색 종이는 텅 비어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흰색으로 꽉 차서 발 디딜 틈 없는 빽빽한 물질이 된다. 디자이너는 흰색의 종이와 글자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빽빽하거나 비어있는 공간을 상상하며, 페이지를 넘기면서 달라지는 의미와 콘셉트에 맞춰 작업을 한다.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한 일반 사람들은 명함의 주소나 이름 바꾸는 것 정도는 아래한글에서 타이핑하는 것처럼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면 쉽게 수정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의 일을 '직업'으로 생각하는 평범한 디자이너는, 일반인이 보기에 아주 사소한 이런 수정 작업도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태도가 당연히 몸에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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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작업도 이와 같다.
스네어 드럼 하나의 소리를 만들 때도 곡의 콘셉트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과정을 거친다.
스네어의 몸통이 나무인지 철인지, 철이라면 동인지 알루미늄인지, 스네어 피의 재질도 일반적인 코팅 피인지 아닌지, 가운데에 덧대어 있는지, 빈티지 피인지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스네어를 연주할 때 강하게 끊어치는지, 깊이 무겁게 눌러 내려치는지, 가뿐하게 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스네어의 위아래 피의 텐션을 둘 다 강하게 조이는지, 아래만 더 강하게 조이는지, 피를 균일하게 조이는지, 위의 몇 부분만 더 조이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모든 경우를 조합하여 콘셉트에 맞는 하나의 소리를 만든다. 복잡한 테크닉의 연주보다는 곡의 콘셉트에 맞는 소리를 만들고 표현하는 연주가 더 멋지다.
일반인들은 이런 과정을 모른다. 물론 알 필요는 없다. 단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분야에 대해서 '쉽게(함부로)'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손'으로 직접 해봐야 그 분야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것 같다.
글을 잘 쓰려면 책을 100권 보는 것보다 한 페이지의 짧은 글을 직접 써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음악을 깊이 이해하려면 좋은 앨범 100개를 듣는 것보다 곡 하나를 직접 연주하고 만들어 보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디자인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 본 경험이 없다면 그 분야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그림을 직접 그려본 경험이나 음악을 직접 만들고 연주해 본 경험이 없거나 적은 평론가들의 글을 보면 잘 공감되지 않는 부분이 보일 때가 있다.
연주력만 좋다면, 그 뛰어난 연주력에 가려져서 곡의 '멋짐'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연주자가 유명하다면, 그 명성 때문에 한 번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것 같다. 더 예술적이라고 인정되는 특정 장르를 하는 것만으로도 호감을 보이는 것 같다.
좋은 테크닉을 보는 관점도 차이가 있다. 화려하고 복잡한 테크닉을 낮춰보고, 좀 느리고 단순하지만 표현력 있는 연주를 더 높이 쳐준다. 그런데 그 기준이 모호할 때가 있다. 테크닉도 뛰어나고 표현력도 좋은 연주인데, 트렌드나 어떤 이슈에 맞지 않으면 '빠르기만 하고...'라며 폄하하기도 한다.
음악뿐만 아니라 그림을 평론할 때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작품의 정보를 알려주거나, 한 개인의 공개적인 감상문 정도의 평론이면 좋을 듯싶다. 평론이 권위를 가지게 되면, 평론가 개인이 느낀 감상문이 마치 '진리'처럼 굳어져서 일반인한테 '강요'되는 느낌이다.
자신이 직접 '손'으로 경험하지 못한 분야에 대해서는 너무 편하게 재단하지만 않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