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름 걷히면 모든 것이 맑은 하늘처럼 화창해질 것이다. 파란 하늘을 향해 더 선명하게 다가가려고 녹음은 오늘 묵묵히 비를 견딘다. 녹음뿐 아니라 비만 오면 물이 줄줄 새는 우리 가게도 맑은 하늘을 기다리고 있다. 청소해 주시는 아저씨의 우비는 무게를 더해 가고 나는 이미 습기 먹은 솜사탕이 되었다. 처마에 참새 소리가 얼마나 더 구슬퍼질지 비구름 걷히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빗속에 눌러앉은 까치가 처량해도 이 장마가 지나면 모두 함빡 웃을 거란 걸 믿고 있다.
사람의 관계도 계절과 다를 바 없다. 새로운 계절을 맞을 때마다 여전히 설렌다. 그 계절이 지날 때쯤, 더는 아무 감동을 받지 않는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매번 비슷한 모습으로 찾아오고 때가 되면 아쉬움이나 상처를 품은 채 멀리 뒤로 물러난다. 관계가 할퀸 자리가 있다 해도 그 계절이 지나가기만 하면 순한 새살로 덮인다.
그러나 그렇게 아물 거라고, 쉽게 지날 거라고 위로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상실과 분노의 감정은 끝나지 않을 낙인처럼 보인다. 그 깊이를 주변 사람들이 가늠하는 것도 겉보기로 등급을 매기는 일이다. 어차피 지나간다는 걸 경험치로 알고 있다고 해도 그 순간은 헤어나올 수 없는 용광로에서 영원히 뼈를 태우고 있다고 느낀다. 그렇게 재로 변하고 있는 나를 위한답시고 계절이 바뀌듯 상황은 달라질 거라는 말로 위로해 본들, 오히려 공감조차 불가능한 내 상실과 분노의 깊이만 확인할 뿐이다. 거꾸로 타인을 향하는 내 위로 또한 마찬가지다. 오롯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다면 내 섣부른 위로는 얼마나 가벼운가.
그렇다고 나를 공감해 주는 타인의 배려를 배타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또한 내가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한다 해서 그 아픔이 나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타인의 상처와 아픔, 상실과 분노가 살갗을 파고들 때면 보듬지 못하고 제대로 위로하지 못하는 나 자신, 알맹이를 파내 말린 표주박 같다.
나는 이성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이다. 근거가 명확해서 논리적인 판단이 가능할 때만 그렇다. 하지만 선택의 근거는 대부분 불분명하고 갈림길에 선 나는 조금 친숙해 보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래서 선택이라는 말, 나에게는 실수 연발과 동의어이다. 지인이나 친구가 선택한 길이라면, 신상이나 가족이 위협받거나 삶의 질을 현격히 떨어뜨리지 않는 한 그 옳고 그름을 먼저 따지지 않고 그와 같은 길을 선택한다. 당신에게 공감하고 있다는 행동이다.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안되니까 이럴 수밖에 없다. 옳거나 그른 것의 형체는 거의 안개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한 번씩 맑게 걷히는 안개는 실수의 확인과 그에 따른 후회를 떠 안겨 주지만 같은 상황이 오면 나는 항상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