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지난 번에 수보리가 그 자리에 앉아있던 대중들을 대표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과연 그가 어떤 질문으로 “이 고요한 정적을 깨뜨릴까?” 1,250명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의 입을 쳐다 보고 있는 것은 ⟪금강경⟫을 읽는 사람도 마찬가지겠다.
수보리가 몇 가지 질문을 하고나면 아마 그 다음부터는 대부분 부처님이 질문의 주도권을 갖고 이야기를 이끌어 갈 것이 다. 그런데...
수보리는 엉뚱하게도 부처님을 앞에 두고 부처님에 대한 칭찬을 먼저 꺼낸다.
“당신은 보살들의 마음을 잘지켜주시고 감싸주는 분입니다”
에헤이...
그런데 보살은 스님이건(출가)와 아니건(재가)가 상관이 없다. 대개 스님이 전형적인 부처님의 제자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스님이란 불교를 배우는 여러 가지 길 중에 하나일 뿐이다. 대승불교란 가르침에서는 출가인가 재가인가란 형식적 구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서울로 올라 가는 중부고속도로에서 제1선을 타나 제2선을 타느냐가 큰 차이가 없듯 같은 목적지를 향하는 다른 길일 뿐이기 때문이다.
불자들은 재가나 출가자나 똑같이 보살계를 받으면서도, 스님들은 따로 스님들의 계를 받고 그 전통을 따르기 때문에 출가스님과 재가불자의 관계는 매우 모호하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공경’, ‘예의’니 하는 것들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공경’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금강경⟫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출가한 스님이란 형식을 특정 카르텔이나 클래스처럼 받아들인다면 그건 분명한 오류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전통에서 기록된 ⟪금강경⟫역시 ‘비구’스님들도 모두‘보살’로 보는 것이다. 즉 비구인 동시에 보살이다. 이런 이들을 ‘출가보살’이라고 부른다. 물론 재가불자님들은 ‘재가보살’이다. 이제 ‘1,250인의 비구들’은 ‘1,250인의 '스님보살'들 혹은 1250인 의 '보살스님'들로 알고 있도록 하자.
다만 이것은 “보살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 ⟪금강경⟫의 표현 방식으로 조금 바꾸자면, “어떻게 사는 삶을 보살이라고 하는가?”가 주제이니까 먼저 부처님은 보살이란 존재를 어떻게 여기는가 하는 것을 대중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나온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다. 동참한 모든 이들에게 부처님을 소개하는 수보리의 사회자 멘트인 셈이다.
아... 우리 석가모니 붓다께서는 그동안 보살들을 매우 잘 챙겨주시느라 항상 애쓰시는 분으로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이 부처님의 강의를 귀기울여 들으시면 보살로서 경력에 큰 도움이 되실겁니다. 네네...
경전에 많이 나오는 ‘선남자 선여인’은 주석문헌들에 ‘좋은 가문에 태어난 이들’이라고 되어있으나, 여기서는 진리를 공부하고 중생들과 함께 해탈하고자 마음을 낸 보살들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는 ‘선남선녀’는 자태가 고운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니 어감이 비슷해도 맥락은 좀 다르다. 그러니 수보리가 ‘선남자 선여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어보니 부처님은 ‘보살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작되는 내용에서 알 수 있듯, ⟪금강경⟫은 ‘보살’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보살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어디에 사는 누가 대중들을 위해 무엇을 보시했습니다”
라고 공표하는 것이 전통이다. 대중들은 보시자가 마음을 내서 그 공양물이 내게 온 줄 알고 그를 위해 각자 마음으로 그 고마움에 대해 축원을 해 준다. 그것이 진짜배기 불교식 축원이다. 그러니 누가 베풀었는지 아무도 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소중한 재화나 노동력을 제공했으니 우리는 모두 그 고마움에 대한 감사를 해야하는 것이다.
“나는 중생을 제도 했다”
고 말하고, 바로 다시
“나는 그런 적이 없다”
고 스스로 번복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선행과 마음에 남겨두는 방식은 대개의 상식과는 간발의 차이가 있다. 부처님은 당신이 지난 시간동안 온갖 종류의 중생으로 태어난 이들을 이끌어서 열반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그 자리에서 바로 딴소리를 하신다.
“한 중생도 내가 열반으로 이끈 적이 없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부처의 행위를 함으로써 부처가되는 것이지 어떤 부처란 정해진 존재가 있어서 당신이 하는 모든 행위가 부처의 행위는 아니란 것이다. 마치 바람이 불기를 멈추는 순간 바람은 더이상 바람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불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다시 바람이라고 불린다. 그러니 ‘부처의 자아’와 ‘중생의 자아’가 따로 있다는 생각은 오해라는 부처님의 충고로부터 이 가르침이 시작되는 것이다.
‘중생衆生’이란 ‘살아있는 것들’ 정 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정이 있는-유정有情’이란 번역어도 있다. 이 표현의 원어가 산스끄리뜨 사뜨바sattva이다. 불교에서 모든 존재는 사뜨바이다. 심지어 보살도 사뜨바이다. 소리나는대로 음사하면 ‘살타薩陀’인데 이게 줄어서 보살의 ‘살’이다.그러니 보살도‘깨달음을 추구하는 중생’이란 뜻이다. 중생도 중생나름이다. 사실 사뜨바는 그냥 ‘사람’, ‘존재’, ‘~자’라고 번역해도 되니 ‘깨달음을 추구하는 중생’이 좀 어색하다면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라고 해도 좋은 번역이다.
A는 사람들에게 항상 친절하게 대한다. 부드럽고, 자애로우며, 앞장서고, 진취적이다. B는 항상 퉁명스럽다. 늘 뚱하고 표정없는 얼굴로 불편하게 사람들을 대한다. 대화를 해도 말을 툭툭 던진다. 어느날 어떤 집에 불이 났다. A는 발을 동둥 구르며 안에 사람들이 있다고 안타까워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B는 집안에 있는 사람을 위해 불난 집으로 뛰어들어가서 사람을 구해 나왔다. A, B 중 누가 좋은 사람일까?
두사람 모두 잘못을 한 것으로 보인다. A는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발만 동동거리는 이상의 용기를 보여주지 못했고, B는 평소 사람들의 마음을 늘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A의 평소 모습이나 B의 용기있는 행동은 또한 선행일 것이다.
사람은 가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와 선행을 내세우며 자신처럼 그것을 해내지 못하는 이들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부지런한 것은 게으른 것에 비해 좋다고 보인다. 그러면, 하루에 4시간을 자는 사람은 부지런하고, 그 이상을 자는 사람은 게을러서 나쁜 것인가? 깨끗하게 사는 것은 나쁠것이 없다. 즉 좋은 것이다. 하지만 자신만큼의 청결을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선도, 정의도 아니다. 깨끗한 사람이 깨끗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신이 불편해진다면 그 깨끗함이란 좋기만 한 가치일까.
바로 내 기준으로 정한 ‘깨끗함’이란 ‘선’이란 그 관념을 ⟪금강경⟫은 ‘상相’이란 말로 표현한다. 그리고5,149자로 이루어진 내용전개에서 대부분을 이‘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내려놓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금강경⟫이 가르쳐주는 철학은 오직 자신이 오래도록 옳다고 믿어왔던 것들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에게만 유효하다. ⟪금강경⟫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안타깝게도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