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드러나는 마음
20년 전 그 음악을 처음 접하고 꽤 괜찮다고 느꼈다. 멤버들의 연주력, 악기들의 사운드 톤도 수준급이었으며 곡의 구성이나 아이디어도 좋았다. 주위 음악 하는(혹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평론가들도 그 음악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성적으로는 그 음악이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좋아지지는 않았다. 굳이 그 음악을 여러 번 듣고 싶지는 않았다.
음악에는 그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사람의 마음이 담긴다. 곡 구조를 기획하고 설계하는, 음악 자체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물리적인’ 디자인과 함께 작곡자와 연주자의 ‘감성적인 의도’가 스며든다. 그 과정에서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사람의 성정(性情)이 표현된다. 음악은 꽤 직관적이고 직설적이라 이런 성정(性情)이 쉽게 드러난다.
괜찮았던 그 음악이 끝내 좋아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 곡에 담겨있는 ‘의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음악을 연주하고 만드는 입장이 된 지 20여 년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그 ‘의도’를 알아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 음악에는 남들과 다르게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강박이 있었다. 음악 자체를 좋아한다는 느낌보다 뭔가 다르게 해야 한다는 ‘의도’가 더 강했다. 남들이 빠르고 화려한 테크닉을 숭상하면, 그와는 달리 더 깊이 있는 느낌을 주기 위해 일부러 느리게 만드는 것 같은, 그런 ‘의식적인’ 것을 말한다. 자신이 깊이가 있다는 것을 외부에 보여주려는 의도가 우선이다. 물론 작업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허영’이 필요하다. 허영은 작업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중요한 에너지다.
하지만 자신이 깊이 있다는 것을 외부에 보여주는 것이 1순위라면, 그 작업의 겉 완성도는 높아질지는 몰라도 그 작업이 좋아지지 않는다.
쥐스킨트의 단편 ‘깊이에의 강요’에 등장하는 예술가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작업을 엄중하게 하는 것보다 외부 사람들에게 ‘깊이’ 있게 보이는 것에 골몰하게 되면 결국 그 작업에는 ‘깊이에의 강박’만 담긴다.
예전에 정말 잘하는 연주자와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 그분이 기분 좋게 술을 좀 마신 상태로 무대에 함께 올랐다. 그런데 좀 많이 마신 것 같다. 그분의 박자에 맞추려는 나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되었다. 꽤 힘든 공연이었다. 알코올이 함께 연주하는 사람의 존재를 깔끔하게 지워버렸다.
곡을 만들고 연주를 할 때, 특히 함께 연주를 할 때, 같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나와 함께 하려는지, 서로를 배려하는지, 이끌려고 하는지 따라가려고 하는지, 테크닉을 과시하려고 하는지 좋은 음악을 함께 만들려고 하는지.
음악의(모든 예술작품의) 겉 완성도가 괜찮아도 그 안에 담긴 의도가 단지 깊이를 과시하려는 것이라면 그 작업은 여러 번 감상하고 싶어 지지 않는다.
아. 그런데 예외적인 경우도 있긴 하다. 자신이 깊이가 있다는 것을 대놓고 과시해도, 겉으로 드러나는 아이디어와 완성도가 아주 높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재미’가 있기 때문에 몇 번 더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물론 오래 남지는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