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ritif님의 댓글을 보고 우리 집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경우에 따라 재수 없음 주의
일단 우리집은 굉장히 보수적이에요. 저는 어릴때부터 밤 12시 이후에 집에 들어와 본 적이 없고, 사실상 11시 이후로 지하철을 타 본 적도 없네요. 아르바이트가 끝날 때 모부에게 문자를 해야 하고, 친구랑 놀다 오려면 어디서 놀 건지, 누구랑 놀 건지도 말해야 해요.
중학생 때 일입니다. 저녁 8시에 학원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친구들을 마주쳤어요. 같이 피자 먹으러 가자던 친구의 말에 아빠한테 허락을 받으려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빠가 불같이 화냈죠. 밤 8시에 무슨 친구들이랑 피자냐고.
또 있어요. 친구랑 주말에 조조영화를 봤던 날이에요. 아마 오전 10시쯤일 거예요. 아빠한테 전화가 왔었어요. 너 무슨 애가 집에 안들어오고 주말에 놀러 다니기만 하냐고, 빨리 들어와서 공부나 하라고 했었어요. 이 때가 중학교 3학년 때였을 거예요.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인데, 중3때 잠깐 성적이 떨어졌었어요. 당시에 제일 친한 친구가 밖에 나가서 노는걸 좋아하고 집안 분위기도 프리한 애였어서 제가 주말에 그 친구와 자주 놀긴 했었어요. 그 당시 저한텐 센세이션한 친구였죠. 집순이로 살던 애한테 그런 친구가 생겼다는 게 기뻤어요. 근데 내 모부는 그 친구를 싫어했어요. 성적이 떨어진 날 아빠가 저한테 호통을 치셨어요.
"그런 애 사귀지 말고 너한테 도움이 되는 애를 사귀란 말이야."
5년이 지나도 잊혀지지가 않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저 친구와 서서히 멀어졌습니다.
이건 작년에 있었던 일이에요.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친한 동기들끼리 모여서 저녁을 먹고 있었어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던 동기가 다 같이 자기네 집에서 놀다가 자고 가라고 했어요. 엄마한테 문자를 드렸죠. 그랬더니 바로 전화가 와서 그 동기 이름이랑 전화번호, 동기 모부의 전화번호를 요구하더군요.
"동기가 어디 살아? 걔네 집은 넓어? 동기 번호랑 걔네 부모님 번호 다 보내. 안보낼거면 집에 들어와."
동기에게 도저히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집에 들어갔었어요.
말로 다 못할 정도로 에피소드는 많지만 저희 집안 분위기는 이정도로 끝낼게요.
어쨌든 저희 집은 굉장히 보수적입니다.
제 모부에겐 상처가 되겠지만, 저에 대한 집착이 두분 다 굉장히 강하세요. 두분은 저를 굉장히 사랑하십니다. 근데 그 사랑이 제가 원하는 형태의 사랑이 아니에요.
지금부터는 모부가 제게 준 사랑을 써볼게요.
우선 저는 집안일 할 줄 아는게 하나도 없어요. 설거지, 청소, 빨래, 요리 다 못해요.
설거지나 청소, 빨래는 어릴 때부터 모부가 못하게 했어요. 밥 짓는 법도 모르고 세탁기 돌리는 법도 몰라요. 설거지는 가끔 하는데 모부는 제가 설거지 하는 모습을 보이면 본인이 하겠다고 저를 말리세요.
베이킹이 취미이긴 한데 어디까지나 취미고 한식은 해본 적이 없어요. 저녁 못 먹고 밤에 늦게 들어올 때면 모부가 "우리 딸 배고프지? 엄마/아빠가 밥 해줄게" 하시면서 따뜻한 밥 차려 주십니다. 제가 하겠다고 해도 굳이 다 해주셔요.
아빠는 제가 늦게 들어올 때면 항상 태우러 와주시거나 동네 큰길까지 마중 나오세요. 버스정류장에서 저를 기다리시다가 저와 길이 엇갈려서 허탕을 치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에요. 집에 다 도착할 때 쯤 전화가 와요.
"예쁜 딸 어디니? 아빠 버스 정류장 앞인데."
"나 집에 거의 다 왔는데?"
"그래~? 알겠다 집에 가 있어라."
그러고는 저보다 늦게 집에 들어오셔서 제게 잘 다녀왔냐고 웃으며 물으십니다.
경제적으로 힘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아 우선 저는 그렇게 잘 사는 집 자식은 아니에요. 그냥 적당히 평범한 집에서 태어났는데, 누군가에게는 이게 복이겠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겨우 그 정도로?' 하는 수준이겠지요. 어쨌든 보편적인 경우로 생각 했을 때 저는 유복하게 자란 편인 것 같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친구랑 옷을 사러 가 본 적이 없어요. 항상 부모님과 같이 갔었고, 매장에 가면 직원분이 옷을 골라주시고 설명도 다 해주는 게 당연한건 줄 알았습니다. 친구와 같이 쇼핑을 간 건 중3때가 처음이었는데, 친구가 매장에서 옷을 마음대로 꺼내고 만지는 것을 보고 저는 친구에게 물었어요. "그래도 되는 거야?" 그 친구가 매우 당황해 했던 게 기억에 납니다. (위에 써 놓은 저와 멀어진 그 친구가 맞습니다.)
모부께 뭔가를 사달라고 했을 때 안 사주신 적이 없고, 뭔가를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렸던 적은 없긴 하지만요. 어쨌든 돈으로 허덕여 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하십니다.
아빠는 제게 관심의 표현을 많이 보이세요.
제가 풀이 죽어 있어 보이면 제게 찾아와서 말씀하세요.
"딸,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아빠한테 말하렴."
뭐가 됐든, 모부는 저를 사랑하십니다.
저도 모부를 사랑합니다.
다만 서로가 원하는 사랑의 형태가 조금 다를 뿐이죠.
애증의 관계
아빠 이야기를 해볼게요.
아빠는 가부장제의 틀에 갇혀 있으면서도 나름 동년배 아버지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합니다.
어렸을 적 이야기예요.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까지 아빠는 회사 일로 많이 바쁘셨어요. 그래서 거의 주말에만 아빠를 볼 수 있었어요. 아빠는 피곤해서 하루종일 잠만 잘 법도 한데, 주말동안 아빠가 거의 모든 집안일을 다 하셨어요. 청소, 빨래는 모두 아빠 몫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요리는 엄마가 하셨지만요.
지금도 아빠는 제 친구들의 아버지들보다 더 가정적(?)이신 것 같습니다. 가정적이라는 표현을 싫어하지만 문맥상 쓸 수 밖에 없네요. 제 친구들이 자신들의 아버지를 욕할 때 슬프지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 아빠는 다른 50대 남성들에 비해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지만 아빠가 항상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또 아니예요.
제가 고등학생일 때 일입니다. 주말에 모부와 제가 밥을 먹고 있었어요. TV에서는 안녕하세요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엄마 "신동엽이가 방송 작가랑 결혼했었나?"
아빠 "PD랑 결혼 했을걸?"
엄마 "예전에 모델 000이랑 열애설 나지 않았어?"
아빠 "뭐, 놀 땐 그런 여자랑 놀고 결혼은 좀 얌전한 애랑 하고 싶었나 보지, 뭐."
당시에 저는 여성주의를 배워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아빠의 저 말에 정말 화가 났었어요. 그대로 밥 먹던 숟가락을 식탁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 버릇 없게 말했어요.
"아빠 무슨 말을 그렇게 더럽게 해?"
정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저렇게 말했었어요.
엄마는 제게 버릇없게 그게 무슨 짓이냐며 호통을 치셨고, 아빠는 당황하셨는지 벙 찌셨습니다. 밥 맛이 떨어진 저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왔구요. 엄마는 저 날 저를 용서하지 못하셨고, 아빠는 제게 사과하셨습니다.
저 에피소드가 아니고서도 아빠의 여성 혐오적인 발언, 성 차별적인 발언은 수십가지가 되지만, 이만 할게요.
저는 아빠를 사랑해요.
하지만 아빠의 저런 모습들을 볼 때마다 슬프고 화가 나요.
어쨌든 아빠와 저는 사이가 좋습니다. 아빠는 제게 잘 해주세요.
세상에서 가장 스윗한 아빠라고 해도 될 정도로요.
그래서 저를 더 마음 아프게 합니다.
모부와 저의 관계는 끊어질 수 없고, 저는 끊고 싶지도 않아요.
하지만 모부의 오래된 사고방식은 저를 힘들게 합니다.
저는 사랑을 굉장히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지금도 받고 있고, 앞으로도 쭉 받을 예정입니다.
@aperitif님이 제게 "위니님은 집에서 사랑을 아주 많이 받고 자란 사람 같다"고 하셔서 의식의 흐름대로 끄적여 본 글입니다. 그래서 가독성이 떨어지겠지만, 이 글은 저를 위한 글이니까 따로 손을 보지 않고 올리고 싶어요.
누군가는 제 글을 보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집이 좀 보수적이긴 하지만 저만큼 잘해주신다면, 저만큼 사랑해주신다면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니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당신이 부러워요.
저도 밤 늦게 놀다가 새벽에 들어와 보고 싶습니다. 늦은 밤길에 뒤에 누군가가 쫓아오는 게 아닌지 걱정하면서 마음 졸이고 싶지 않아요. 더불어 아빠가 그런 저를 걱정해서 데리러 오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제가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제게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딸들이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성주의를 배웁니다.
모부가 제게 주신 사랑은 제게 벅차고 감사하고 기뻐요.
저는 그 사랑을 남들에게 다른 형태로 주고 싶어요.
족쇄가 아닌 자유로 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