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연장과 종의 보존이 생명의 대전제이고 최근 인류에게 그 전제가 무색해지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는 내용을 포스팅했었습니다. 제 포스팅 중에 최고 보상이 찍혀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생명을 개체의 생명으로만 보는 익숙하지만 오류일 수 있는 전제에서 출발한 글이었습니다.
우린 생명하면 개체의 생명을 떠올리는 것이 익숙하지만 아시는대로 도킨스 같은 경우는 개체보다는 유전자의 입장에서 바라봤습니다. 비록 개체의 생명을 연장하고 개체 종을 보존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유전자의 입장에선 유전자 총화적으로 이런 변화가 더 나은 유전자가 번성하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변화는 도태의 또 다른 형태일지도 모릅니다. 적극적 혹은 능동적 도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이렇게 '적극'이나 '능동'이란 단어가 떠오른 것도 가만 보면 역시 의지나 의식을 과대평가하는 습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변화가 유전자 입장에서 선택된 것이라면 개체의 의지는 사실 어떤 관여도 할 수 없기도 하고 유전자 역시 의지를 갖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이런 단어는 적절치 못 합니다. 그저 이기적인 유전자의 또 다른 형태의 도태 정도가 현재로선 적절해 보입니다.
또 하나 께림칙한 것은 왠지 이런 생각에선 자연도태의 비정함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제가 갖고 있는 세상에 대한 낭만적 가치 체계에선 용납하기 곤란한 모양입니다. 하긴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허겁지겁 '이타적 유전자'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세계는 본래 적대나 우호로 나뉘는 것이 아니고 보면 비정하게 느껴지는 것은 제 주관적 느낌이므로 유전자 수준에서 선택된 도태의 다른 형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철회해야 할 근거는 되지 못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유전자의 입장에서 개체가 생명을 스스로 끊거나 번식을 포기하는 것이 어떻게 유리한지 명쾌하게 납득되진 않습니다. 더구나 개체나 유전자가 아닌 아직은 잘 모르는 또 다른 입장이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안락사와 존엄사를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생명에 대한 자기 결정을 찬성하거나 그런 논의를 하고싶은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결혼에 관한 다양한 형태들에 관해서도, 혼자 사는 것에 관해서도 제 견해를 밝히거나 논의를 촉구하고자 하는 마음도 전혀 없습니다. 사실 그러지 않아주시길 부탁하는 바입니다. 다만 물리적 차원에서 생명의 연장이나 종 보존의 포기로 보이는 현상에 대한 제 나름의 생각을 쫒아가 보고싶은 글입니다. 역시 사회적 현상에 대한 사회적 통찰을 염두에 둔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암중모색이지만 생각을 조금 더 진전시켜 봅니다. 생명의 연장과 종 보존이란 대전제를 놓는다는 것은 그것을 유지하는 원리도 놓는다는 말입니다.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없음과의 긴장을 놓았다면 최소한 있음은 아닌 상태입니다. 물론 있음도 없음도 아닌 상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있음이 궂이 거길 왜 지향할까요? 하지만 '왜?' 라는 질문 자체가 목표지향이므로 이미 이것도 있음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기는 합니다. 또 여기서도 있음은 이미 개체의 생명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체와 있음의 자리에서 있음도 없음도 아닌 곳을 바라보는 것은 제대로 된 통찰일 수 없습니다. 뭍에서 바다 건너 섬을 바라본다고 그 섬의 해안선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위에서 한 번 조망해 보기로 합니다. 생명의 연장이나 종 보존이란 목표도 없고 보상과 댓가도 없다는 것은 자극은 있어도 반응이 없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린 이 상태를 생명의 사라짐이나 죽음으로 이해하지만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없을까 생각해봅니다. 생명의 연장과 종 보존의 포기와 물리적으로 같은 것은 물론 있을 수도 없습니다만 그 물리적 현상은 나중의 심리적 현상으로 이행되는 중에 나타나는 중간과정일 수는 없을까요?
실제로 과거 물리적 현상으로 해석되던 것들이 결국 심리적인 것의 유비였던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과정 중에는 실제로 물리적 행동도 서슴치 않았던 경우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고행 같은 경우죠. 부처님께서 포기(?)하신.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도 어쩌면 예수님의 무의식 안에 있던
사탄에 의한 것이었다고 전 생각해봅니다.
사실 회심은 심리적으로 회심 이전에 있던 생명의 죽음에 비유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탄생이 물리적이라면 사춘기를 지나 자아가 굳건해지는 것도 제 2의 탄생이라 은유합니다. 그렇다면 없음으로의 이행을 물리적이라기 보다는 심리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떤 과정이 이런 결과를 만들 수 있을까요? 미움을 그저 사랑으로, 집착을 그저 놓음으로, 분노를 그저 용서로 바꾸는 그것은 무엇일까요?
지나간 2천년은 거기에 신을 끼워넣었었습니다. 신의 은총을. 물론 끼워 넣은 것이라기 보다는 호모사피엔스가 협동하고 사유하면서 더욱 세련되어진 추상의 획일적인 모습이고 그건 인류의 인지 발달 과정에서 자연스런 이행일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단지 강요되고 주입된 신과 은총만을 입에 올린 것이 아니고 치열한 각성 가운데 끊임 없는 버림을 통해 거기에 이르려고 했던 많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바로도 수 많은 이들이 애썼고 그 흔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밤을 지나 신을 만나고 또 누군가는 합일했고 혹은 누군가는 해탈을 하고 열반했습니다.
과거에는 일부의 사람들만이 그 길을 갈 수 있었지만 21세기는 어느 때보다 많은 이들이 보다 수월하게 그 길을 따라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 스팀잇만 해도 마음챙김 피드에 수 없는 주옥 같은 글들, 특히 체험에 근거한 글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인류는 정말 거기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인류 전체에게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요? 최소한 지금의 제 생각으로는 그건 수직 상승입니다. 보다 정교한 심리학적 이해가 되어지기 전까진. 물론 그 길을 가는 이들에겐 각고의 시간이겠으되 보다 명료한 과정 없이 오로지 개별적 체험을 통해서만 이르는 수직 상승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치열함의 극단까지 가서 그것마저 놓고 이르는 그 길을, 그 길에 이르는 납득 가능한 심리학적 설명은 없을까요? 과거 신화를 과학이 그렇게 해 왔던 것처럼. 그래서 지금은 많은 이들이 납득하게 된 것처럼. 그런 점에서 '해 봐! 해 봐야 알게 돼.'는 맞는 말이기는 하되 잘 모른다는 반증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더 그 과정에 주목하게 됩니다. 자극이 무력해지고 반응 없음으로 되는 그 과정. 혹 우리가 미쳐 모르는 어떤 힘들이 반응을 없앤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극이 유발하는 익숙하고 강력한 감정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그 과정을 어떤 것일까요?
현재까지는 그 감정에 머무르며 거리를 두고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사실 감정이란 것이 습관이고 익숙한 주관적 가치 판단의 결과이고 과거에 집착하는 것임을 알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고나면 그 강력했던 감정은 심지어 눈 녹듯 사라지기도 하고 놓아버리기가 훨씬 수월해지기도 하고 최소한 거리 두기가 가능해지기도 합니다.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 혹은 어떤 경우는 심리전문가와의 대화나 정신치료를 통해 그것이 가능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 수 많은 이론과 접근방법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또 강렬한 감정에 휩쓸리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법들이 정말이지 많습니다. 종교를 비롯해서 자연이, 운동이, 취미가, 여행이, 심지어 음식이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모두 일리는 있으되 유일한 해법일 수 없는, 결국 잘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여하한 방법이든 그것이 지향하는 바가 기존의 익숙한 반응이 아니고 생명의 연장과 종 보존에 보다 적합한 무엇이라면 21세기인 지금, 자극이 그 적합함의 반응이 되도록하는 그 과정은 무엇일까요?
물론 이런 사유는 합리나 논리라는 틀 안에서 벌어지는 것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합리나 논리가 먹히지 않는 무의식의 내용들도 결국 자아나 의식이 납득 가능한 것으로 발견하고 분화시켜야 하는 것이므로 무의미해 보이진 않습니다.
구슬은 꿰어져야 보배가 되고 자기는 실현해야 참 자기가 되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