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챙김] 번아웃 상태에서 실의 목소리를 듣는 존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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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평판에 민감합니다. 그런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건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리적 신체가 아니면서도 물리적 신체와 같은 기능을 하는 신체입니다. 그 신체를 사회적 신체라고 해도 좋겠군요. 이 사회적 신체에 위해를 가하면 우리는 실제로 물리적 신체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일하며 평판이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평판지위가 높아지기를 원하며 그것이 올라가지 않았을 때 고통을 느낍니다. 마치 몸이 아픈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길들여지기 쉽습니다. 말하자면 열심히 노동을 하기 쉬운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항상 깨어있어야 하고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하며 대기중에 있어야 합니다. 사회에서는 그게 개념있는 것이라고 주입하기도 합니다. 그게 욕망을 갖고 사는 것이라고 하고, 열정을 갖고 사는 것이라 합니다. 하지만 그건 몸을 갖고 있는 기투된 존재조건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열심히 할 것을 강요합니다. 그렇게 가속하다 보면 진이 말라 버립니다. 번 아웃되어 버립니다. 번 아웃은 단순히 우울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감시하고 억압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증상입니다. 민감함 사람들은 더 빨리 감지할 뿐입니다.

인간이 네안데르탈인과 다른 점은 인간은 실을 짓는다는 사실입니다. 실이라 함은 연결한다는 걸 말합니다. 네안데르탈인의 뇌는 구획되어 있어서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이것과 저것을 연결합니다. 그게 현현화된 것이 언어입니다. 인간 언어는 은유와 환유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은유와 환유라는 실을 갖고 이것과 저것을 연결합니다. 이를 유동적 지성이라 합니다. 종교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유동적 지성은 리좀형입니다. 다 방면입니다. 위계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게 딱딱한 사회의 잣대, 즉 평판에 맞물리면 흐리지 못하게 됩니다. 평판은 줄을 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의 신경생리적 조건, 즉 평판의 하락을 신체적 고통으로 느끼는 조건을 활용해서 줄을 서게 만듦니다. 평판이라는 게 사실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물리적 가치는 없는 것이지요. 사회적 가치가 있고 신체 생리적 가치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에 가치가 생기는 것. 마치 화폐와 같습니다. 화폐도 역시 사람들이 공통으로 교환수단이라고, 가치저장 수단이라도 믿어야 하기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도덕경 13장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총애도 모욕도 받으면 몸이 놀라고, 큰 근심이 몸에 닥칠까 두려워 놀란다. 왜 총애도 모욕도 받으면 몸이 놀라는가? 총애는 높은 것이고, 모욕은 낮은 것이다. 얻어도 놀라고 잃어도 놀란다. 이 때문에 총애도 모욕도 받으면 놀란다. 왜 큰 금심이 몸에 닥칠까 두려워 놀라는가? 내가 큰 근심을 지니는 까닭은 나에게 신체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나에게 신체가 없다면, 내게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 몸으로 천하 위하기를 귀중히 하면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제 몸으로 천하 위하기를 좋아하면 천하를 부탁할 수 있다.

사회적인 몸이 있기때문에 고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건 수목형 몸입니다. 일방향적으로 위계화된 몸입니다. 그러나 뒷부분에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천하와 소통하는 몸입니다. 바로 유동적 지성이 살아 있는 몸입니다. 우리 몸은 사회적 몸이기도 하지만 생태적인 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애니 '너의 이름은' 에서 이런 아름다운 말이 나오더군요.

실의 목소리를 들어보렴
그렇게 계속 감아보면
얼마 안 있어 사람과 실 사이의 감정이 흘러나온단다
실은 말하지 않는 걸
집중하란 거야
우리의 끈목에는
이토모리 천 년의 역사가 새겨져 있어
알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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