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 9월 16일]
자존감 없는 사람을 낳는 사회구조입니다. 그런데도 자존감있는 사람으로 살라고 요구합니다. 사실 자존감이란 말이 맞기나 한 것일까요. 자존감의 근거에는 변치 않는 자아란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자존감을 지키고 쌓으려고 하는 게 오히려 사람을 지치고 피폐하게 합니다. 고정된 자아라는 건 없다는 걸 알면, 지켜야할 자존감 같은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흐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그 고요한가 아닌가 입니다.
고요를 말하니 종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전략입니다. 우리는 한정된 에너지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요하지 못하면 탈탈 털리고 맙니다. 부정적인 감정에만 털리는 게 아닙니다. 긍정적인 감정에도 털립니다. 흥분된 자극들은 에너지를 과하게 사용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게 습관이 되어 버리면 항상 분주한 마음이 디폴트 모드가 되어 버립니다. 방황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에너지가 탈탈 털립니다. 그러면 여유있게 대응하지 못합니다.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유는 마음의 넘치는 힘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그 힘은 자존감같은 허상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고요함에서 나옵니다.
고요함은 단지 현재를 아는 것에서 발현됩니다. 자신 안에 어떤 감정의 스텍트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단지 아는 것입니다. 인정하는 것입니다. 저항하거나 이기거나 통제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의 감정만 있지 않습니다. 슬픔이라는 것도 색깔이 다 다릅니다. 짙은 슬픔도 있고 엹은 슬픔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동시에 혼재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쁨도 있고 불안도 있습니다. 정서 안에는 그렇게 여러 가지 복합된 색조가 있습니다. 자기와 친하지 않는 사람, 자기를 따스하게 대하지 않는 사람은 감정의 언어도 얇습니다. 하나의 감정만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 보면 지금 느끼는 감정은 하나의 언어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사실 해석입니다. 즉 외부에서 주어진 그대로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닙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면 뇌는 미리 그 일이 어떤 것일 것이다 라고 예측을 합니다. 그리고 그 예측을 기반으로 감정을 만들어 놓습니다. 이 때 감정은 진폭을 갖습니다. 어떤 폭을 갖습니다. 예측의 폭을 갖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태가 좀더 분명해지면 그 진폭이 줄어듧니다. 그리고 감정은 점점 분명해 집니다. 말하자면 감정이라는 것은 진폭을 갖은 예측에서 시작해서, 어떤 것으로 분명해 지는 해석인 것입니다. 과거에 경험했던 것으로부터 여러 감정의 범주를 갖고 예측을 하다가 좁혀진 범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마치 시각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잔의 그림을 보면 시각이 산이라는, 들이라는 재현을 하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외부의 대상은 본래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닙니다. 뇌에서 시각을 구성하는 과정을 겪고 나서야 우리가 보통 보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세잔은 그 구성의 과정을 드러냅니다. 외부의 사물에 대해 뇌가 해석하기 시작하는 그 지점을 그립니다. 그래서 인상파인 것입니다. 재현되지 않는 인상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감정도 시각과 같습니다. 뇌에서 여러 감정의 스펙트럼을 갖고 외부의 사건을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그게 어떤 감정이라고 결론내립니다. 따라서 분명하게 느껴지는 감정 이면에는 여러 감정의 진폭이 숨어 있습니다. 그걸 인식하는 것, 그게 마음챙김입니다. 그게 고요해 지는 지표입니다. 그게 마음에 여유와 힘이 생기는 지표입니다. 그리고 그건 큰 전략입니다. 단언코 그럽니다. 왜냐면 일상적인 스트레스 상황에서 뇌가 탈탈 털리는 게 보통 사람의 포지션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