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겠어. 왜 뜬금없이 밤바람을 맞으며 네 생각이 났는지. 정확히 너와 언제 헤어졌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봄이었을 거야. 어쩌면 가을이었을지도 모르지. 이젠 올해가 지나면 너를 보지 않고도 나는 10년을 살아온 거고 역시 네가 없어도 나는 잘 살 수 있었어.
내가 말한 적 있었나. 너의 첫인상. 1 학년 때 지나가다 너를 봤는데 조금 놀랐던 건 내가 예전에 좋아했던 남자애와 얼핏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내 친구는 너를 가리키며 학년 남자 애중 가장 몸이 좋다고 하는데 믿을 수가 없었어. 내 눈엔 그저 작고 마르고 안경을 끼고 정이라곤 요만큼도 없는 차가운 인상이었을 뿐이니깐.
어쩌다 보니 2학년 때 우린 같은 반이 되었는데 여전히 너와 난 서로 말 한마디 섞어본 적이 없었어. 그때 인상적인 사건 하나가 벌어지지. 맞아. 너는 신념이 충실한 혁명가에 가까웠고 굉장한 이상주의자였어. 예비 신학생이었던 너는 성당은 24시간 열려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성당을 닫으려는 학교를 상대로 단식투쟁을 하였어. 난 지금도 정확히 네가 뭐 때문에 그 힘든 싸움을 이어갔는지 알지 못해. 다만 한 달 후 너는 눈에 띄게 말라갔고 안색이 안 좋아져서 잘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널 걱정했지. 단식을 억지로 그만두게 된 날 너는 울었어. 분해서인지 무력함때문인지 그것 역시 알 수 없어. 물어본 적이 없거든. 다만 난 네가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지.
아마 그때 나도 모르게 너라면 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우린 어쩌다 보니 주변인들과 엮어서 가끔씩 도시락도 같이 먹긴 했지만 딱히 너에게 호감 같은 건 없었어. 너와의 대화는 정말 재미없었거든.
그런데 몇 달 후 내가 심적으로 많이 힘들 때 갑자기 네가 의지가 많이 됐어.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나질 않아. 장면만이 기억 남아. 우리는 하필 짝이 되었고 우연히 저녁 시간 교실에서 마주치곤 했어. 1 분단 두 번째 줄, 왼쪽 창가로는 햇빛이나 바람이 들어왔지. 나는 자주 왼쪽 뺨을 책상에 대고 울고 있거나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곤 했어. 그러다 네가 오면 나는 자는 척을 했지. 너는 교복 상의를 내게 걸치곤 아무것도 못 본 채 그냥 교실을 나가곤 했어.
그러던 어느 날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고 하필 네 의자에 그 교복 상의가 걸쳐져 있는 거야. 나는 너의 교복을 베개 삼아 베고 너의 체취를 느끼고 있었어. 내게 안정감을 주었거든. 그런데 하필 교실 문을 드르륵 열어버린 너랑 눈이 딱 마주치곤 얼마나 민망했는지. 그 순간 내가 우울하단 생각도 잊은 채 나는 변명을 했어. 너는 아무 말하지 않고 내 앞자리에 앉아 나를 보았지.
그때 네게 처음으로 내가 왜 힘들지 이야기했던 것 같아. 너의 표정을 잊지 못해. 너는 마치 내 이야기에 상처 입고 고통을 받는 사람 같았어. 아무렇지 않은 척 이젠 자습실로 돌아가자고 하고 일어났어. 너는 등 뒤로 나를 강하게 안았어. 설레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고 감동적이었어. 그때 그 포옹은 온전한 위로와 공감이었어. 이성적인 감정이 아닌 한 인간에 대한 애정.
지금도 신기해. 그때 아무도 교실에 들어오지 않은 게 말이야. 너와의 타이밍은 고등학교 때는 늘 끝내줬던 것 같아.
내가 더 힘들어지자 나는 너에게 마저 아무것도 털어놓을 수 없었고 너를 피했어. 어쩌면 내가 너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해서 일지도 몰라. 너 역시 내게 굳이 적극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지. 그리고 뭐 학교를 쉬고 어쩔 수 없이 돌아왔지. 나 사실 그 날 엄청 무서웠어. 도망가고 싶었어.
너는 좀 이상하고 고집스러운 부분이 있어. 나중에 듣게 되었는데 내가 안 나온 한 달 동안 1 분단 맨 앞 구석자리에 혼자 나를 기다리며 앉아있었다고 하드라. 굳이 담임 선생님께 내 짝꿍은 앞으로 자기가 할 거라고 허락을 구했어. 넌 참 이상해. 덕분에 다행이었어. 옆 자리에 아무것도 묻지 않는 네가 앉아 있어서. 덕분에 남은 2달 동안 맘 편했어.
아이들은 우리가 사귀는지 안 사귀는지 내기를 하곤 했어. 선생님은 우리가 사귀든 안 사귀든 신경 쓰지 않았어. 나랑 제법 친한 친구가 조심스럽게 물어봤을 때 내가 생각해 봤는데 당사자인 나도 모르겠더라. 진짜 모르겠다고 내가 웃으니 헛웃음을 지었어. 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실 그런 건 우리 사이에 중요치 않았어.
내가 꽤나 호전되고 나서 우린 자연스럽게 연인 사이가 되었고 그 시절 10대 아이들이 첫사랑을 할 때 겪을 만한 감정과 생각과 추억을 평범하게 공유했어. 다만 한 가지 네가 예비 신학생이란 사실이 조금 특이하긴 했지.
재밌는 건 언젠간 끝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 관계가 내겐 오히려 편안함을 주었고 너를 더 마음껏 좋아하게 만들었어. 그리고 신에 대한 확신이 있는 줄 알았던 너는 내게 비밀을 털어놨어. 날 만나지 않았다면 신학교는 안 갔을지도 모른다고. 네가 가장 믿음이 흔들릴 때 나를 만났고 나를 사랑하며 너는 신의 존재를 더 알고 싶어 졌고 그 일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어. 재밌어. 내가 우울했고 네가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소설 같은 연애를 할 수 있었다.
너는 나의 생명의 은인. 사랑을 믿게 하고 사람에 대한 의미를 준 사람. 네가 내 연인이 아닌 건 상관없었어. 그래도 우리는 평생 알고 지낼 거라 생각했는데. 네가 평생 내 주변에 머물 줄 알았는데. 나는 너 없이 내가 못 살거라 생각했어.
3년 후 너는 신학교를 나왔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어. 몸은 더 말라버렸고 발성법이 달라졌지. 그리고 생기라곤 하나도 없는 기계 같은 인간이 되어버렸지. 그래도 나랑 있을 때 넌 그냥 고등학교 때 그 모습에 가까웠어. 어쩌면 네가 유일하게 숨 쉴 구멍은 나와 함께 했던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어.
우리가 연인이 아닐 때도 1년 만에 전화통화를 해도 매일 본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화를 하다가 넌 꼭 하던 말을 멈췄어. 그리고 내게 말했어.
보고 싶어. 지금 봐야겠어. 보러 갈게.
어느 날은 내가 '그래'라고 대답했고, 어느 날은 '안돼. 끊자.'라고 대답했어.
다시 만났던 우리는 어른이 되었고 서로에게 잔뜩 상처와 생채기를 안겨주고 역시 헤어진 연인은 다시 만나는 게 아니라는 교훈만을 남겼어. 나는 너와 헤어지기 위해 단단한 결심을 해야 했어. 네가 그리울 때마다 가장 잔인했던 너의 순간을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생생하게 각인했어. 그러면 보고 싶던 그 마음은 보지 않겠다로 돌아섰어. 우리는 헤어질 수 없을 것처럼 서로 맞지 않아도 상처를 줘도 늘 서로에게 돌아가려고 했어. 습관처럼 관성처럼 당연히 인생의 한 부분을 차지한 사람들처럼.
역시 3개월쯤 지나 넌 아무렇지 않게 내게 전화를 걸었고 나는 네게 말했어.
이번엔 진짜 헤어진 거야. 연락하지 마. 나 다른 남자 만나.
그리고 정말로 그때 이후로 우리는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어. 그리고 6개월 후 너의 소식을 들었다. 나는 다른 남자와 잘 사귀고 있었고 너 역시 다른 여자와 행복해 보였어. 그랬구나. 우리는 서로가 없이도 잘 살 수 있었는데 왜 그걸 놓지 못하고 괴롭혔을까.
넌 왜 그랬을까. 언젠간 내 귀에 그 말이 들릴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굳이 넌 나와 헤어진 후에야 왜 그런 말을 했고. 나는 또 그걸 들어버렸어. 나를 얼마나 사랑했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넌 이렇게 대답했데.
내 팔 한 짝, 다리 한 짝 정도는 아까워하지 않고 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위해선 눈 하나 정도는 포기할 수 있었어.
넌 항상 과하고 뒤틀린 부분이 있었어. 너의 희한하고 살벌한 고백이 날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기에 마음이 울렁거렸고. 그럴 거면 헤어지지 말든가 서로 시답잖은 이유로 헤어지고 나서 저런 말이나 하고 다니는 네가 한심하고 미웠다.
순수하고 어렸던 너는 과거에 내게 말했었어.
네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걸 받아들일 자신이 없어. 죽어버리고 싶을 것 같아. 그러니깐 말하지 마.
지금 내 세계엔 네가 없어. 너를 아는 사람이 있지만 네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네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어디서 뭘 하면서 살고 있는지 나는 몰라. 나는 이제 곧 결혼하는데 이젠 저 깊고 소유욕에 가까웠던 감정은 담담해지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해. 넌 아마 다른 사람을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을 테고. 나만큼이나 변했을 거라 믿어. 우리가 헤어질 당시 서로 너무 어둡고 지쳐있어서 그게 아쉬워.
그래도 너는 내게 소중했던 사람이야. 고마워. 잊지 않을게. 네가 행복할 거라고 믿으며 살아도 되지?
나의 첫사랑이었던 너를 그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