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경 | Diamond Sut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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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어떤] 조건에 [집착을] 두지 말고 베풀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형상에 [집착을] 두지말고 보시해야 하고,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감각적인 [대상들에 따른] 생각에 [집착을] 두지 말고 보시해야 합니다. 보살이 [그런 것들에] 집착을 두지 않고 베푸는 복덕은 한량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동쪽 허공을 셀 수 있겠소?"
"없습니다."
"남, 서, 북쪽의 사방과 위 아래의 허공은 셀 수 있겠소?"
"없습니다."
보살이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하는 보시의 복덕은 그것과 같이 셀 수가 없습니다. 보살은 오직 이런 방식으로 [보시해야]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거룩한] 몸을 보고 여래를 봤다할 수 있겠소?"
"아닙니다. [거룩한] 몸이라는 것을 통해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여래가 [거룩한] 몸이라고 말씀 하셨지만 그것은 실제로 [거룩한] 몸이 아니라 [실은 그냥 이름일 뿐입니다.]"
"32상으로 여래를 봤다고 할 수 있겠소?"
"아닙니다. 32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여래가 말씀하시는 32상이란 상이 아니라 [32상이란] 명칭[에 지나지 않습니다].
잘 갖추어진 신체의 형상을 보고 부처를 봤다고 할 수 있겠소?
아닙니다...
잘 갖추어진 모든 [32]상들을 보고 여래를 봤다고 할 수 있겠소?
아닙니다...
소유와 베풂이란 상반된 행위는 참 다른 것 같아서 대개 사람들은 많이 소유하고 있으면 편한, 원하는 삶을 살 거라고 여긴다. 문제는, 이것이 착각이라는데 있다. 물론 남들보다 가진 것이 월등히 많아서 조금은 누리고 사는 이들도 있지만, 소유란 그 한계가 명확하다. 소유란 결국 소비를 위해 있는 것이고, 가진만큼 쓰게 되지만 왜 우리는 그 목적을 잃어버리고 소비하지 못하는 만큼의 더 많은 소유를 하려는지는 아무도 모를지도 모르겠다.
물리적으로도 재화란 쌓아두면 멈추고 내어 놓으면 도는 법이다. 물이 움직이는 물은 맑지만 고여있으면 썩어버리기 마련. 돌기만 하면 새로 만들지 않아도 내 활동만큼의 생존과 소유를 누릴 수 있으니걱정은 내려놓는 편이 좋다(고 믿을 필요가 있다).
소유를 자신으로 안다니 무슨 말인가. 그야말로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갖고 오는 것 없이 달랑 주먹만 꼭 쥐고 나왔는데 무엇이 얼마나 달라서 서로 계급이 정해지고 한계가 정해지고 인생에서 그 단계를 수없이 상정하겠는가. 결국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가진것’이 무엇인지 혹은 얼마나 많은지, 내 부모가 누구인지, 동창과 친구로 누구를 두었는지, 무슨 차를 타는지, 어떤 메이커의 옷과 가방과 구두를 가졌는지... 나를 둘러싼 조건들이 나를 규정한다.
불교는 철학적으로 철저히 무아를 내세웠지만, 정작 부처님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각자의 ‘자기 자신’이라고 역설했다.
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생긴 것’, ‘가진것’과 상관없이 각자 그 스스로가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인지 가르치지 않는가. 세상은 거칠고 힘들지만 ‘네가 원하는 것은 무조건 할 수 있고, 해 보아야 하며, 실패도 소중한 가치이며, 두번세번 쓰러져도 일어나면 된다’라고 가르치지않는가.
이제 소유에 관한 이야기를 접고 베풂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보시란 소유의 정반대 개념이다. 인도의 자이나교Jaina교도들은 불교와 5가지 계율을 공유하는데, 우리는 다섯번 째에 불음주, 즉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모든 것들을 취하지 말라는 계율이다. 따로 이야기 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는 단순히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식으로 말하면 향정신성 약물일체에 대한 금지조약 이다.
자이나가 무소유를 개인의 수행을 위한 도구로 친다면, 불교는 적극적인 베풂을 권장하는 사회적인 목표에 더 무게를둔다. 즉 무소유의 가치는 보시를 통해 가장 빛난다. 그래서 재화의 가치가 가장 무거운 보석들을 아낌없이 베푸는 조 금은 황당한(?) - 대체 그 보석이다 어디서 생길 수 있단말인가? - 이야기가 계속 ⟪금강경⟫에서 중복되는 것이다.
‘보시’는 산스끄리뜨로 다나dana인데 이걸 음사해서 예전에는 불자들을 ‘단월’이라고 불렀다. 이후에는 보시하는 주체라고 하여 ‘시주施主님’이라고 불렀으니 지금의 보살님, 거사님은 많이 발전된 표현이다. 왠지 ‘시주님’이라고 부르면 자꾸 절에 보시하라고 압박하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았겠는가싶다.
보이고 들리는 대상, 즉 조건을 염두에 두지 말고 보시하는 것이 보시바라밀인데 우리의 베풂은 보시바라밀이 아니다. 대개 베풂을 받는 대상에 조건을 두기 때문이다. 부처님 앞에는 불전함이 있고, 물론 돈을 넣으시라고 봉투가 들어갈 만 한 구멍도 파 놓았다. 불자들은 거기에 아마 보시를 하면서 내심 ‘내가 이렇게 보시하니까, 이 공덕이 더 큰 좋은일로 내게 돌아오겠지’ 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인지상정. 너무도 당연하다. 거기까진 좋은데, 만약 그게 가시적인 효 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쌀 한 바가지로 대학붙여 달라는 내 마음도 검지만,
그거 한 바가지 다 받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당신 속도 아주 누렇소”
틀린말은 아니다.^^
부처님의 자비가 돋보이는 것은 무연자비無緣慈悲 - 아무 연고나 관계없는 이들에게 똑같이 자비로 대하는 것 - 이기 때문인데, 당신의 문하에 들어온 스님들께 보시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했다면 “내 식구만 더 챙겨주세요” 라고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일반적인 ‘사랑’과 뭐가 다르겠는가. 그렇게 쓰여진 경전이 있다면 누군가가 잘못 들었거나 잘못 썼기 때문이며, 실제 로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사실이 있다면 당시 사회상이 지금같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아닌데도 여전히 부처님이 그렇게 진심으로 말씀하셨다면, 그건 부처님이 틀렸다.
자, 6경에 걸리는 것 없이 조건없이 베풀 때 그 공덕이 한량없다. 물론 이 한량없는 공덕을 기대하는 순간! 역시 6경에 걸리게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사실 6경에 걸린 상태로 베풀면, 말하자면 조건을 두고 베풀 때 우리는 분명 어떤 상황이나 리액션이 내 생각과 부합하지 않을 때 마음이 불편해진다는 것은 사실 예측 가능한 일이다. 대개 누군가에게 아낌없이 했더라도 그 상대가 그 호의를 당연힌 것 처럼 받아들일 때 마음이 상하지 않던가. 그래서 베풀기도 내가 베풀었는데, 베풀지 않았다면 상하지도 않았을 마음을 우리는 돈을 써가며 상하게하는 것이다. 그러니 실은 조건이 걸린 모든 베풂은 까딱하면, 공덕이 아니라 화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조건을 걸었다고 누가 벌을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건이 걸리다 보니,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내 베풂이 서운해진다. 나는 좋은 마음으로 베풀었는데, 받는 이들이 큰 반응도 감사도 없으니 서운해진다. 인지상정이나, 그 서운함이 베풀지 않은 것 보다 못한 상황을 만든다.
누가 더 많은 3천배를 해 봤는지, 천수경을 얼마나 빨리 읽을 수 있는 지, 누가 유명한 큰스님들과의 인맥이 많은지... 진상스님들도 많고, 진상불자들도 참 많다. 철인3종 경기에 나갈게 아니라면 3,000배를 선수쳐서 대체 뭘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바위가 되고싶은게 아니라면 가만히 더 오래앉아 있는 것으로부터 스스로가 깨달음과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는것일까. 수행이라는 구실, 아니 착각에서 온 과욕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는 쥐고, 얻고, 획득하는 방식이 아니라 더 많이 내려놓을 수 있는가 하는 방식으로부터 행복과 자유를 얻는다.
사실 “깨달음을 얻는다”란 말도 쉬운 말로 표현하기 위한 것일 뿐이지 결코 옳은 말은 아니다. 무슨 뱃지 획득도 아니고, "온전히 내려놓은" 사람을 깨달은 사람이라 하는데, “얻는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니 소유는 생존을 누리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하지만 손익의방식을 따르지 않는 결정도 할 수 있어야 때로는 마음이 손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절을 하고 경을 일고 기도하는 것은 좋으니까 열심히 한다. 열심히 살다보니 그렇지 못한 이들이 눈에 잘 뛴다. 가끔은 불러다 가르치기도 하고, 뒤에서 절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그 한심함을 비웃기도, 비난하기도 한다. 내가 가는 길이 옳고 바른길이니 마음놓고 타인들을 비난할 수 있다. 그리하여 순경계의 길에서 타인들의 잘못을 지적질하고 다니며 정작 자신의 길을 잃어버렸다.
금강경에서 여태 그렇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가 그마저, ‘하나의 상’에 불과하다. 무착문희 스님은 문수보살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다가 실패했다. - 정확히 말하면 만나고도 몰라봤다 - 나중에 자신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지고 나니 부처가 따로 필요 가없었다. 그러니 동짓 팥죽을 휘젓고 있는 김위로 문수보살이나타나니 그 큰주걱으로 문수보살의 싸대기를 쳤다.
"죽 젓 는데 걸리적 거리니 저리 비키쇼!"
문수보살이 뜨거운 팥죽이 묻어있던 그 큰 주걱으로 싸대기를 맞았지만 기분이 좋았으면 좋았지, 결코 맘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