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마리아와 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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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니 만 일년동안 불교이미지 연재를 멈추고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코너를 생각나게 한 것이 오늘 소개하는 ‘마리아와 동자’란 현대 작품이다. 이 그림은 조금 생소할 것이다. 이 작품은 ‘Annunciatio’, 성모희보聖母喜報 혹은 수태고지受胎告知라고 번역하는, 성모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이다.
고려불화를 관심 있게 본 사람이라면 금새 알 수도 있을 것이지만, 바로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의 구도를 그 그림에 중첩시키고 있다. 그리고 저 작은 크기로 표현된 동자. 즉 선재동자가 수월관음도와 같은 위치에서 성모 마리아를 바라본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관음보살일까. 아마도 그럴것이다. 동자는 그녀보다 비중이 작아서 작게 표현된 것도 아니고 ‘동자’, 어려서 꼭 작게 표현된 것도 아니다. 다만 불화를 그리는 이들이 깨달은 존재와 그렇지 않은 중생 의 크기를 나름 구분해서 표현한 것이다. 그걸 따라 그리다보니 이 작품에서도 동자는 작게 표현되었다. 고려불화에서 보면 선재동자는 관음보살의 발하나 크기 밖에 되질 않는다.
이제 중생도 크게 표현할 수 있고, 불상앞에 마주 당당히 서서 예경을 해도 버릇없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도 예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들의 인식지평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한 프랑스 여성이 스리랑카의 한 절에서 불상에 키스를 하다가 징역형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헤드라인은 ‘충격’이라고 기사가 올라 왔다.
이 작품에 대해서도 가히 충격으로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관세음보살을 마리아로 바꾼 것이 충격일 수도 있을 것이고, 아마도 메신저 가브리엘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상대 적으로 작게 표현된 불화의 선재동자가 충격일 수도 있을 것 이다.
사실 이런 예가 처음은 아니다.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에 가면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스님이 성모 마리아상을 조성하는 이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조성한 관음보살을 만날 수 있다.
마치 문학적이고 수사적인 픽션에 지나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은 이런 상상이 불교, 혹은 종교의 본질에 더 가까운 의무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관음보살이란 존재는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지만, 사실은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역사적 관음보살들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만들어 둔 정해진 규칙과 요구사항을 잘 지키는 것에 따르는 것이 정말 좋기만 한 것인지 그걸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혹시 공존을 파괴하고 있지는 않은지.
세상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더럽고 깨끗하다는 분별심을 뛰어 넘을 수 있도록하는 것이 불교다. 그 간단하지만 우리가 쉽게 하지 못하는 것을 작가는 그림을 통해서 이루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