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amugae(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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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집에서 직장까지 출퇴근하는데 1시간이면 그나마 가까운 편이다는 이야기를 듣는 세상이 되었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고 나처럼 사는 곳이 행정구역상은 서울이지만 외곽지역이라 사실 경기도민과 별반 다를 게 없이 하루 평균 2~3시간을 대중교통 안에서 보내게 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여느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9 to 6 사무직에게 출퇴근 시간의 지옥철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 먼 길을 직행으로 한번에 가는 방도가 있으면 좋으려만 세상은 장거리 여행자들에게 잔혹하기 그지 없다. 어째서 내가 사는 곳과 내가 가야하는 곳은 항상 한 번 이상의 환승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있을까? 이것은 대중교통 노선도를 짠 관계자들의 음모가 틀림없다. 그들은 분명 나를 괴롭히는 것이 유일한 세상의 낙일 것이다. 이런 변태들이 나 하나만 괴롭히는 걸로는 당연히 성에 찰 리가 없다.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은 그래서 모든 환승역이 아비규환이다. 그 시간대의 열차에는 항상 적정인원보다 많은 인원이 동시에 탔다가 동시에 내린다. '앞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도록 스마트 폰 등이 닿지 않게 주의해달라'는 안내 방송 멘트는 그 순간만큼은 뒷짐지고 한가한 말이나 하는 선비의 꼰대질이나 다름없다. 아무런 정보전달의 역할도 하지 못하는 영양가 하나 없는 소음일 뿐.
신도림이나 대림이나 강남이나 고속버스터미널과 같이 환승역들 중에서도 특히나 유동인구가 더 밀집되어 있는 역에서의 환승은 환승작전이라고 불려도 무방할 만큼 치열한 육탄전을 펼쳐야 하고 또 그마만큼의 체력을 소모해야 하는 서바이벌의 현장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발이 땅에 닿지 않은 채 공중부양으로 자동적으로 지하철 밖으로 나오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율주행모드가 되어 등떠밀려 계속 앞을 향해 걸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직장인들은 집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일상의 치열한 전투를 매일 벌이고 있는 셈이다.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옆 사람과의 간격이 좁고 팔 하나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서 가는 지하철 속 풍경에서 내가 가장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다들 신기하게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뭔가를 꼼지락 거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나는 안 그러는 것처럼 들리는데 사실 나도 마찬가지다. 즐겨하는 핸드폰 게임이 없기에 내가 주로 출근 시간에 핸드폰으로 하는 것은 소셜미디어 타임라인 확인과 비트코인 시세 확인, 뉴스 읽기 정도이다. 긴 시간을 그냥 버리는 것 같아 그 시간에 전자책이라도 읽어볼까 했는데 아침 지하철에 도저히 그건 무리여서 포기했다. 궁금하긴 하다. 소셜미디어든 뉴스든 마찬가지로 전자기기를 이용해 활자를 읽는 행위인데 왜 전자책은 더 접근하기가 힘들까? 단순히 지문의 길이의 문제일까? 그게 지금 중요한 건 아니다만.

아무튼 이렇게 직장생활을 한지 어연 3년이 되어가던 어느 날, 나는 아침마다 나와 같은 시간에, 나와 같은 열차를 나와 같은 역에서 타서 같은 역에서 환승하고 같은 역에서 내리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아마 나와 같은 동네에 살고 내가 일하는 회사와 같은 동네에 있는 회사를 다니고 있는 비슷한 처지의 직장인일테다. 그도 나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는 모르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도 하나 없고 말 한 번 안 걸어봤고 심지어 눈도 제대로 한 번 못 맞춰보고 멀리서 뒷모습이나 앞모습만 봐와서 솔직히 얼굴도 잘 모르겠지만 앞서 언급한 저 몇 가지 공통점만으로도 나는 동지를 한 명 알게 된 기분이 들었고 이 험난한 세상 나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묘한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그가 어디있는지 한번 주변을 스윽 둘러보는 게 하루의 일과 중 하나가 되었고 행여나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날에는 오늘은 좀 늦는 것일까, 아니면 앞 열차를 타고 먼저 간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오늘은 출근을 하지 않는 기쁜 날인가 하는 등등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각인된 계기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그 사람이 하던 핸드폰 게임 때문이었다. 그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멀뚱멀뚱 서 있게 되는 그 순간부터 최종 목적지 역에 도착할 때까지 1시간 15-20분 정도의 시간을 오롯이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면서 갔는데 처음부터 그를 관심있게 지켜본 것은 아니었다. 우연이라는 표현이 알맞을 것이다. 그날따라 유난히 지하철엔 사람이 더 많았고 정말이지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을 정도만의 공간만을 남기고 모두가 다음 환승역까지 옴짝달싹 못하고 부동자세로 가야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때 그가 내 바로 코 앞에 서 있었고 그의 신체 중 유일하게 자유로운 한 쪽 손으로 열심히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땐 내가 보고 싶어서 핸드폰 화면을 쳐다본 게 아니었고 핸드폰 화면이 내 눈 앞에 놓여졌고 그걸 안 보는 게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마을을 건설하는 게임이었고, 열심히 일정 시간이 지나면 수확한 곡물을 재배하고 건물을 짓고, 옆 마을을 공격하여 영토를 늘리고 레벨업을 하는 것이 목적인 흔한 모바일 게임 중 하나였다. 어렸을 때 컴퓨터로 심시티를 잠깐 해본 게 그러한 종류의 게임을 한 유일한 경험이었던 나는 처음엔 '요즘은 핸드폰으로도 저런 게임을 다 하는구나' 하며 신기해 한 게 내 내면의 유일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단순노출효과라고 하던가? 딱히 보고 싶어서 보는 게 아니라 그냥 매일 출근하는 길에 보이는 그 사람은 항상 같은 게임을 하고 있었고 , 또 화면이 꽤나 큰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어서 굳이 주의 깊게 쳐다보지 않아도 옆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를 자연스럽게 듣듯 핸드폰 화면 속 게임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꽤나 성실한 플레이어였던 것 같다. 화면의 왼쪽 상단에는 그 사람이 키우는 캐릭터와 마을의 레벨 및 경험치가 큼직하게 표시되어 있었는데 하루가 다르게 숫자가 높아져 가는 게 보였다. 모바일 게임은 회전율이 빠르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 같았다. 그는 항상 그 게임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그 게임의 룰이나 스토리를 전혀 모르는 나조차도 어느 순간 꽤나 몰입하여 그의 플레이를 곁눈질로 몰래 구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게임 속 세계와 캐릭터를 응원하는 마음도 한 켠에 생기게 되었다.
처음 그의 핸드폰 화면을 우연히 봤을 때 작은 마을 속 헐벗은 캐릭터는 어느 새 웅장한 도시 속 영웅이 되어 있었고 점점 더 삐까번쩍하고 강력한 아이템들을 장착하여 나날이 풍요롭고 강해져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요즘처럼 인생이 슬럼프이고 아무런 의욕도 없고 돌파구도 보이지 않는 쳇바퀴 도는 일상을 살고 있는 나는 언젠가부터 출근길에 보이는 그 사람과 그 사람의 핸드폰 속 게임 세계를 보다보면 그 모바일 게임의 캐릭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캐릭터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나는 저 가상세계 속 캐릭터의 하루만도 못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한심하고 괴로운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나날이 레벨업을 하고 더 좋은 아이템을 끼고, 더 풍요로운 세상을 확장시켜가며 그것들을 수치화 시켜서 매일 확인할 수 있는 저 캐릭터는 행복할까? 당사자 눈에는 안 보이겠지. 그래서 모르겠지... 딴 이야기지만 사실 나는 내 스펙이나 능력치를 게임 캐릭터처럼 하나한 다 수치화해서 볼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불행할 것 같다. '사실 나는 말로 표현하거나 수치화 할 수 없는, 지금 세상에 있는 잣대로는 평가할 수 없는 뭔가가(포텐이) 있어!'라고 모호함 뒤로 숨어버리는 게 불가능해지니까. 그렇다면 저 게임을 하는 그 사람은 행복할까? 잘은 모르겠지만 나와 비슷한 직장인인 것 같은데? 게임을 하는 당시에도 그렇게 행복해보이는 것 같지는 않던데?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사람도 이 게임을 긴 통근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내기 위해 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시간이 아니더라도 집에서나 회사에서 틈틈이 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모바일 게임을 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일부러 시간을 내서 하기보다 이동시간, 식사시간 등등에 틈틈히 하는 용도로 시작한다고 한다. 뭐가 됐든 이 길고 지루한, 그리고 계속해서 반복되는 통근 시간의 진정한 위너는 그 게임 속의 캐릭터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렇게 매일매일 어제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되어 있는 모습이 뭔가 게임 캐릭터에게 부러움을 느낀다고 하면 좀 이상한 것 같다만 어쨌거나 캐릭터 팔자가 상팔자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 남들 다 낭비하는 시간이라고 여기는 시간에 누구라도 하나 발전적이고 유용한 시간을 보내는 게 낫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