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작년에 이른 나이에 떠나간 후배의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아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납골당에 다녀왔다. 작년에 처음으로 후배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복잡한 감정이 들었고,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같은 길을 따라 후배를 만나러 가고 있음에도 그리 큰 감정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란 참 감사하면서도 잔인하다.
납골당에 도착했을 때 평소 이미지로 경험했던 납골당들과 느낌이 달라 조금 당황했다. 주변엔 거대한 송전탑들이 건설되어 있었고, 실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외에 납골당들이 벽처럼 세워져 있었으며, 납골당의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겉에 타일을 붙여놓아 일견 평범한 벽처럼 보이도록 꾸며놓았다. 실외에 있기 때문에 아무나 지나가며 훔쳐볼 수 없도록 망자들을 배려한 것일까. 아니면 겉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조금의 노력이라도 기울여 망자에 대한 예우를 하라는 의미에서 외부에서 볼 수 없게 만들어놓은 것일까. 실제 의도가 무엇인진 전혀 알 수 없었다.
후배가 조금 높은 곳에 있어 접이식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서 문을 열어봐야했다. 계단에 올라가 납골당 문을 열어보니 이미 다녀온 사람들이 가볍게 남겨놓은 쪽지나 사진, 작은 꽃 같은 것들이 놓여있었다. 장식장 밖에 아주 조금의 공간만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 뭔가 두기 어려워 보였다. 그 안에는 후배가 생전에 활짝 웃고 있는 사진과 다른 친구들,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있다.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도 그렇고, 장례식 때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것을 보면, 그리고 나도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이 곳을 찾은 걸 보면 생전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았나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니 잠시 가슴이 시렸다.
유골함을 보고 나니 딱히 더 할 것이 없어 주변을 잠시 둘러보았다. 바닥에는 사망한 사람들의 유골함 위치에 따라 이름과 년도, 종교 같은 것이 적혀있었다. 다 둘러보진 않았지만, 후배보다 어린 나이에 이 곳에 온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닌가보다.
세명의 사람이 돌아가며 한 번씩 인사를 하고나니 마땅히 할 것이 생각나지 않아 주변 묘소들을 돌아보았다. 어떤 납골당들은 화려한 꽃장식 테두리로 꾸며져 있었는데, 옆의 도로를 보니 그런 꽃 장식을 파는 노점이 있었다. 자본이란 어디나 녹아있구나.
돌아다니는 길고양이도 있었다. 평소 동물들과 친하진 않지만 호기심이 들어 가까이 갔는데 도망가지 않고 내 주변을 맴돌았다. 등을 쓰다듬으니 가만히 있는것을 보니 사람들과 친숙한 고양이인가보다. 고양이는 영물이라던데 납골당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녀석일지도 모르겠다. 궁디팡팡을 두번 해주니 슬쩍 쳐다보고는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납골당을 방문한 후 같이갔던 후배의 부탁으로 잠시 인터뷰를 했다. 떠나간 후배를 기념하는 기록물을 만든다나. 떠나간 사람에 대한 슬픔을 억누르고 즐겁게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렇게 떠나간 사람을 계속해서 곱씹고 기념하며 각자가 입은 상처를 다독여주는 것도 좋은 애도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를 통해 여러 질문을 받다보니, 떠나간 후배가 꽤나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공기가 없으면 숨을 쉴 수 없듯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던 사람이 사라져 버릴 때 느끼는 상실감은 생각 이상인가보다.
예전부터 그런 비유를 들었었다. 한 때 친하게 지냈거나 알던 사이였으나 앞으로 다신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은 나에게 있어선 죽은 사람과도 같다고. 그래서 씁쓸하고 아련한 마음이 든다는 비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절친한 사람을 진짜 떠나보내고 나니,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것과 인연이 끊기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언제든 보려면 볼 수 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연락을 하지 못하는 것과, 미칠 듯이 보고 싶어도 다신 볼 수 없는 것은 엄연히 다른 상황이니 말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되는 하루였다. 뭐, 내일부턴 다시 평소처럼 별 생각 없이 살겠지만 오늘 하루 쯤은 괜찮지 않을까?
내년에도 다시 납골당을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