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의 상처는 나름의 대처를 만들어냅니다.
상처란 유쾌하지 않은(불쾌한) 감정적 판단(반응)을 유발시킨 경험입니다. 여기서 불쾌란 불안이나 분노, 우울한 감정입니다. 물론 그맘 때는 감정을 이렇게 구별할 수 없습니다. 사실 성인들도 불쾌한 감정을 이렇게 구별하지 못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유년기의 상처들은 아직은 이런 감정을 구별할 수 없었을 때 받은 것들입니다.
구별할 수도 없이 그저 뭔가 고통스런 감정을 유발시킨 상처는 역시 아직은 대처 요령이 미숙하기 그지 없는 유년에겐 충격 그 자체입니다.
충격이란 단어 자체가 적절한 대처가 불가능한 무엇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이라 절체절명의 본능은 나름의 대처 전략을 만들어냅니다. 전략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사실 많이 미숙합니다.
충격이 크기도 했거니와 경험도 일천하고 인지마저 아직은 마술적이거나 신화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유년이니까요. 더구나 대개의 경우 부모를 필두로 한 가족 안에서 성숙한 대처를 본 적도 별반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만들어진 대처를 심리학에선 방어라고 합니다.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는 것이란 뜻이겠죠. 물론 이것이 의식적인 것일 수는 없습니다. 상황을 적절히 파악하고 숙려한 끝에 나온 전략적 대처가 아니란 것이죠. 생존 본능에 따라 스스로의 의도와 무관하게 선택된 것들이니까요. 그래서 방어기제는 무의식적입니다.
대개는 상처의 경험을 의식에서 강제로 없애는 방법들입니다. 억압, 취소, 소거, 투사 등입니다. 본인의 의식에게 그 경험은 이제 잘 모르는 남의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태도는 동시에 대단히 수세적이 됩니다. 사소한 주변의 자극에 민감해집니다. 위축되는 것이죠. 그렇다 보니 주변 자극들과의 자연스런 상호작용은 협소해집니다.
여하간 나름의 대처는 당시로서는 그런대로 성공적입니다. 그래야 방어로서 의미를 갖게 되니까요. 그래서 이것들은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에겐 어느 정도 검증된 방법이 됩니다. 검증된 방법을 놓아 두고 누군가가 말하는 새로운 방법을 차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삶의 순간에 이미 그 방법은 사용되어졌고 나름으론 성공적이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삶이 상처만으로 얼룩질 순 없습니다. 또 누군가의 삶이 상처만 붙들고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누군가의 삶은 계속됩니다. 상처와 무관한 삶의 다른 부분들은 성장합니다. 유쾌(기쁨, 만족, 즐거움, 편안함, 행복감)한 순간들은 그 부분의 성장을 촉진합니다. 또 그렇게 성장하는 부분들은 무의식에 잠재된 상처의 경험을 자극하여 성장하도록 돕기도 합니다. 물론 그래도 전격적인 상처와의 만남을 통한 해결만이야 하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그렇게 상처를 안고 미숙한 부분을 갖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문제는 다만 삶의 어느 순간, 상처가 연상되는 순간, 잠재의식에 묻혀있던 억압되고 취소되고 소거되고 투사되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더 어릴 때 겪었을수록, 더 충격이 컷을수록, 더 지속되었을수록, 환경이 더 열악했을수록 드러내는 그 모습은 더 크고 질깁니다.
사실 이 순간이 바로 우리가 상처를 다시 작업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비로소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렇게 우린 고통을 통해 또 성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