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죽은게 아니니까 살아 있으려면 살아내야 합니다. 삶 자체, 그러니까 물리적 생존이 목적이라면 어떻든 생존해야 합니다. 그래서 속담에는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도 있습니다. 빅터 플랭클은 '아우슈비츠의 고통- 속에서도 존재 이유와 더 나은 삶에의 희망을 놓지 않았고 그런 목적을 가진 이들 가운데 생존자가 더 많았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물리적 생존이란 다시 말하면 '죽기까지의 살아있음'입니다.
본래 아무 것도 없음에서 있음이 시작되면 그 있음은 없어질 때까지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때부터 있음은 본의 아니게 없음과의 긴장 상태에 놓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탄생은 단세포 생물의 출현부터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종을 보존한다는 대전제를 지닌 채 죽음이나 소멸과 긴장 상태에 놓였습니다.
그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기제는 보상과 댓가란 원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댓가를 치르고 보상을 받는 것이지요. 커다란 보상은 이미 어느새 감당할 수 없이 치러버린 댓가를 의미합니다. 죽음, 소멸, 없음의 상태로 갈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생명의 근본적인 전제가 그렇다는 것은 개체는 유한할 수 밖에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물론 인류로 진화하고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하고 또 정착을 해서 문명이 출현하고 하면서 언제부터인가 죽음, 혹은 사라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된 인류는 거기에 숙명이란 근사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각 생명체는, 태어나서 그 숙명이 실현될 때까지, 보상과 댓가의 원리에 따라 생명을 연장하고 종을 보존한다는 보상을 위해 시간을 포함한 다양한 댓가를 치르며 살아냅니다. 태어날 때 이미 그 기제에 가장 적합하다고 (아마도 유전자들의 상호 소통으로) 인정되는 기제의 총화를 갖고 태어나, 살아내면서 끊임 없이 좌충우돌 실험하며 그 기제를 보다 더 적합하게 만들고 또 다음 세대에 물려주려 뭔가를 보태고 빼는 것이 삶인 듯 싶습니다.
사실 이런 근본적인 전제나 보상 댓가 시스템은 의식적으로 인지되지 않는 때가 훨씬 많습니다. 아니 지구라는 별에서 생명이 시작된 30억년동안, 인류의 역사인 450만년동안 그것이 의식적으로 인지된 때는 거의 없었습니다. 사실이지 그것을 의식적으로 인지하는 것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당장의 물리적 생존이 코 앞의 일인데 그러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을 여유가 어디 있었으랴 싶습니다.
그러나 의식적 인지(가 적절한 표현인지는 두고봐야겠지만, 메타인지, 혹은 사띠, 마음챙김해서 알아차림 하기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바라보기는 추측컨대 각개 인류가 씨족이든 혹은 나중의 부족이든 조직을 이루면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씨족을 이루고 수렵채집을 하던 시절에도 매우 초보적인 수준의 바라보기는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것은 먹을 것이 있는 곳이나 안전한 곳을 조망하던 중에도 필요한 경우, 자신이 그러고 있는 것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수정하고 했을 테니까. 하지만 역시 본격적인 바라보기는, 있는 것을 찾아 소모하던 시기(수렵채집)에서 농경과 목축을 통해 정주 생활을 하게되면서부터였을 것 같습니다. 물질의 잉여가 생기고 이를 저장하고 저장한 것들의 보존을 위해 계급이 생기고 그러면서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구성원들은 점차 삶을 떨어져서 조망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요? 자신들의 본능적인 목표인 생명의 연장과 종 보존의 달성에 보다 더 효율적인 것들을 고민하면서. 부족의 생존과 보존, 그리고 나중에는 민족이나 국가의 생존과 보존이 목표라고 믿었던 이들이 훨씬 많았을 테지만 기실 따지고 보면 유전자의 의도였을. 여튼 그러면서 매우 느린 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한 테크놀로지와 어쩌면 상대적으로 빨랐을지 모를 이데올로기는 변화 내지는 진보했을 것입니다. 전제와 기제는 그대로인 이 생명 시스템 안에서.
헌데 어느 때보다 광범위하게 전제와 기제를 흔드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보상을 위해 댓가를 치르고싶어하지 않거나 생명의 연장이나 종 보존을 포기하는.
살기 어려우면 죽고싶어진다? 실제로 삶의 어려움을 이유로 죽습니다. 혹은 죽기는 그렇고 새 생명의 탄생만큼은 싫다? 실제로 성적 만족을 포함한 만죽을 누리고 살지만 아이는 낳지 않습니다. 함께 사는 것은 그렇고 혼자 살자? 혼자 살되, 그래서 함께 삶으로 인해 치러야 하는 댓가는 피하고 함께 삶으로써 얻는 보상은 유지하는 삶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습니다. 정말 새로운 변화입니다. 신화적 사고와 엄격한 계급으로 살던 세상에선 상상할 수 없는 변화입니다.
고통 없이 죽을 수 있고, 출산과 양육의 고통 없이 성적 만족이나 양육의 기쁨같은 보상만 즐길 수 있고 함께 사는 수고를 하지 않고 그 보상을 누릴 방법들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으니까요. 테크놀로지가 가져온 변화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것 뿐이겠습니까? 소위 인문학의 병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지요. 테크놀로지가 이룬 것을 떠벌이다 돌을 맞은 경우가 한둘입니까?
이미 물리적 생존을 일정 부분 이뤘다고 여기는 인류는 그것을 넘어 보다 나은 삶을 고민하며 생긴 변화일 겁니다. 또 한가지는 하이엔드의 미묘한 차이를 얻으려면 보통의 것들을 위해 치러야하는 댓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댓가를 치러야 합니다. 커진 댓가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즉 채굴 난이도가 유례 없이 커졌습니다. 댓가가 보상을 압도하는 상황은 아닌가 싶습니다.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물리적 생존 자체에 대한 회의는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분명 지금의 인류는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생명이 아닙니다. 물리적 생명의 연장이나 종의 물리적 보존이란 대전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과 생명 연장 혹은 종의 보존을 위해 감내해야하는 댓가, 그리고 그 결과로 얻게되는 보상, 이 모든 것의 무게나 가치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물리적 생존 자체가 아무리 어려워도 종의 보존이란 목표마저 스스로 포기하는 생명체가 인류를 제외하고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목표를 이루기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생명이 끝나는 것을 기다리는 것 말고.
21세기의 인류는 300여년 전 여명이 싹트기 시작한 이래 신의 죽음을 선포하고 신화적 세상 당시의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20여 세기 전, 정주적 삶에서의 물리적 생존 자체가 어려웠던 그 시기에 인류의 스승들은 그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발견했고 그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그것은 욕심을 내려놓자는 것이었습니다. 나누고 사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인류는 또 내려놓으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대전제와 보상과 댓가라는 원리의 가치를 내려놓으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가 익숙했던 물리적 세상을 떠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