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어둠이 내려앉는 나른한 주말 저녁입니다.
반쯤 내린 블라인드 아래, 창너머 왼 편으론 짙거나 옅은 연두색 나무 숲, 그리고 오른 편엔 초록으로 이어지는 가로수, 그 사이를 사선으로 가르는 포도, 그 위를 수 놓은 빨간색 브레이크 등의 긴 사슬. 안경을 벗고 바라보는 그 빛은 희미한 윤곽 덕분에 더욱 영롱합니다. 그리고 오른 편 가로수 너머 몇 동의 아파트, 성당, 그리고 극장도 보입니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스카이라인 위로 점점 짙어지는 잿 빛 하늘. LED 간판들이 불을 켜기 시작하는군요.
벌써 지쳐 잠 든 아내를 두고 침실을 나와 작은 방에 앉았습니다. 고요합니다.
그렇게 롤러코스터 같던 한 주가 또 갑니다. 그나마 이렇게 고요한 시간은 제겐 선물입니다.
그렇게 오래 되진 않았지만 언제부터인가 힘에 겹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마 1년 쯤 된 듯 합니다. 나이 탓을 하긴 이르지만 무시할 순 없나 봅니다.
무엇보다 오후 6시 즈음이 되면 귀가 멍해지면서 모니터가 흐릿해지고 소리마저 목구멍을 빠져나올 힘을 잃습니다. 결국 6시로 진료시간을 당겼습니다. 헌데 그러고나니 4시만 넘어가면 비슷한 양상입니다. 그렇다고 4시로 당길 순 없지요. 가끔은 출근하는 것마저 두려울 때도 생깁니다.
재미있는 유머가 떠오르는군요.
한 건물에 60 초반의 노련한 정신과 의사 한 명과 아직은 젊은 신출내기 정신과 의사 한 명이 따로 개원을 하고 있었답니다. 종일 몇 분 되지도 않은 환자를 진료한 젊은 친구는 퇴근 무렵, 파김치가 되서 기진맥진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곳엔 항상 그 노련한 의사가 원기왕성한 모습으로 서 있더랍니다. 그분은 언제나 자기보다 몇 배나 많은 환자를 진료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비결이 뭘까 항상 궁금하던 차에 하루는 그분께 질문을 했답니다.
"선생님! 제가 알기로 선생님은 저보다 몇 배나 많은 분들을 진료하시는데 어떻게 이렇게 조금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출근할 때 모습 그대로 퇴근하시는 건가요?"
그분께서 말씀하시더랍니다. "자넨 그 사람들 얘기를 다 듣나?"
이제 어둠이 완연합니다. 아직 저는 풋내기인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