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식사를 하고 돌아오던 길가에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꽤 오래 된 일이긴 해도 생생히 기억되는 일이 있다. 우리 부부의 결혼 기념일이 4월 하순 어느날이고 그날을 며칠 남기고 있었던 일이니 딱 이맘때이다.
밀레니엄으로 소란스럽던 만 18년 전의 일이다. 이런 저런 연유로 본의 아니게 몇달째 빈둥대던 때였다. 어설픈 죄책감에 오랜 냉담을 풀고 성당을 가야하지 않을까 막연한 생각을 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나는 시늉만 내고 여느집처럼 아내가 열심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얄팍함으로.
그러던 어는 날, 수화기 너머로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딸 아이가 떼를 쓰며 우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교통 사고로 응급실엘 왔는데 아이가 들어가질 않으려 한다는 얘기였다. 급하게 도착한 응급실 주차장에서 겨우 아이를 달래 병상에 눕힐 때까지만도 몰랐었다. 무섭다고 울긴 했어도 출혈도 외상도 아무 것도 눈에 띄는 것이 없었기에. 당직의에게 경과를 설명하던 순간, 침대에 누워있던 아이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경련발작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이가 봄 소풍을 갔던 날이었다. 소풍을 마친 시각, 아내는 아이를 데리러 학교 앞에 갔었고 엄마 차를 발견한 아이는 웃음을 머금은 채 손까지 흔들며 큰 소리로 길 건너 문방구를 들르겠다고 하곤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고 한다. 그 순간 달려오던 1톤 트럭이 아이를 치었고 아이는 공중으로 떠올랐다 저만치 날아가서 아스팔트에 쑤셔박혔다고 한다. 아내는 그 장면을 차 안에서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서둘러 아이의 뇌 CT를 확인하니 이미 좌뇌 쪽에 커다란 출혈이 보이고 중앙을 넘어 우뇌로도 출혈이 파급되고 있었다. 두개골 골절도 선명했다. 하긴 그 지경으로 아스팔트에 머리를 부딪혔으니.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부모님께 밑의 두 아이를 맡기고 아내와 나는 그날부터 아이곁을 떠나지 못 했다. 중환자실로 옮겼으니 마음대로 볼 수도 없었다. 면회시간만을 기다리다 확인하는 모습은 시퍼렇게 뚱뚱 부은 얼굴로 침대 위에 축 늘어진 가냘픈 아이의 체구였다.
CT를 매일 확인했다. 출혈 부위는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커져갔다. 마냥 수술을 미룰 수만도 없었다. 그러나 수술로 혈종을 제거하자니 합병증이 심각했고, 두고 보자니 혈종에 의한 뇌실질 압박이 생명마저 위협할 수도 있었다.
어떤 결정도 할 수 없었다. 아내와 나는 두 손을 잡고 중환자실 앞에서 매일 무릎을 꿇었었다. 익숙지도 않은 기도를 했다. 그간 부족했던 아빠인 나를 반성했고 건강만 회복한다면, 아니 소생할 수만 있다면 새로운 아빠가 되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했다. 간절했다.
그렇게 피를 말리며 순간순간을 보내던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놀랍게도 혈종의 크기가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드디어 출혈이 멈춘 것이다. 이제 혈종만 흡수되면 되는 것이었다. 아이도 의식을 회복하진 못 했지만 활력 징후들이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사고 2주만에 아이는 의식을 회복했고 2주 정도를 더 중환자실에 있다가 퇴원했다. 꼭 한달만이었다.
그렇게 기적처럼 아이는 회복되었다. 돌이켜보면 설사 목숨을 잃지 않는다고 해도 아이의 삶을 두고두고 괴롭힐 문제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다행이 지금은 아무 일 없이 나름 치열하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단다. 물론 그뒤로 아내와 나는 몇 달간 성당엘 다니다 또 다시 긴 냉담의 시간을 가졌었다.
하느님 은총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우연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누가 알랴?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던 이 계절에 아내와 나는 결혼의 축복과 기쁨도 누렸지만 이 계절은 더욱 감사한 계절이다. 삶의 순간, 가장 간절했던 기도가 이루어진 계절이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