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프레드릭 와츠, '희망']
음악은 어떻게 태어나게 된 것일까. 크게 세가지 견해가 있던 것으로 기억해. 하나는 언어의 부산물이라는 거야. 본래 진화적 유용성은 언어에 있었고, 음악은 여기서 우연하게 태어난 일종의 부산물 같은 거야. 그런데 그 부산물이 듣기에 좋아서 독립된 발전을 한 것이란 견해야. 스티븐 핑거의 견해지. 많이 비판받고 있어. ㅎㅎ 다음에는 짝짓기의 방법이라는 거야. 마치 공작새가 꼬리를 펴서 암컷을 유혹하는 것처럼, 성선택을 위한 화려한 도구란 거야. 노래를 불러서 짝을 유혹하는 거. 나름 설득력 있지? 음악성이 뛰어난 사람이 이성으로부터 인기도 많고 짝짓기의 기회도 많잖아. ^^ 마지막으로 공동체의 화합을 위한 거야. 같이 부르는 노래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고 공동체가 집단 선택에서 유리하게 도와줬다는 거지. 노래덕분에 서로 유대감을 가지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거야.
여하튼 노래는 인간의 깊은 심성을 건드리는 측면이 있어. 소리를 인식하는 감각인 귀는 촉촉한 기관이기도 하지. 즉 눈과는 달라. 훨씬 폭넓게 많은 것들을 감성적으로 받아들이지. 이것이 좋고 저것이 나쁘고. 쾌와 불쾌를 훨씬 더 깊이 받아들이는 기관이기도 해. 훨씬 더 미묘하고 말야.
쾌와 불쾌가 나왔으니 말인데,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라는 영화가 있어. 토마스 만의 소설을 영화한 거야. 빈의 대표적인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이야기를 영화한 거지. 여기서 말러는 미소년을 사랑해. 그러면서 음악적인 고뇌를 하게 되. 듣기 좋은, 화음이 잘 이뤄져 있는 음악과 죽음을 담은 음악 사이에 말야. 즉 화음이 흐뜨려져 있는 악마의 음악 사이에 말이야. 쾌와 불쾌를 고민하는 거지. 그러면서 불쾌라는 것도 넘어야 할 기준이라는 걸 깨닫게 되. 화음이 꼭 완벽하게 이뤄져 있지 않더라도 어떤 음악적 미학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지. 말러의 교향곡을 들으면 불완하면서도 뭔가 끌림이 있잖아. 그런 거지. 쾌와 불쾌를 넘어서는 것 말야.
인간의 뇌는 단순해. 아메바와 같지. 즉 쾌를 좋아하고 불쾌를 피하는 것말야. 그래서 어떤 행동을 하고 그것이 쾌가 될 때 이것은 습관이 되고 말아. 그리고 그 습관은 자아가 되고 말지. 마음챙김을 가만히 하고 있으면 우리가 인식하는 쾌와 불쾌가 결국 학습된 것에 불과한 것이란 점을 알 수 있을 거야. 즉 좋고 싫어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학습된 것에 불과한 것이란 점이지. 쾌와 불쾌에 자아가 결합되고 불쾌한 것이 들릴 때 우리는 움추려 들지. 수축되는 거야. 피할려고. 사실은 넘어서야 할 지점이야.
주위에 보면, 인증받은 맛집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 얄팍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어. 왜냐면 그건 인정욕구와 다름 없거든. 그곳에 다녀와서 마치 미식가인 것처럼 말하는게 좀 재밌기도 해. 진짜 맛을 알기는 아는 것일까. 이미 학습된, 남이 인정해 줘야 하는 그런 맛을 찾아다니는 거니깐. 진짜 맛을 알기보다는 남들로부터 자아를 확인받고 싶은 거야. 쾌에 매달려 있는 자아를. 그 자아와 너무 하나가 되어 있는 거지. 주체가 말야.
감각이 주는 쾌와 불쾌를 넘어설 때, 그리고 그것들이 훼손하지 못하는 어떤 고요한 지점에 이를 때, 마음챙김에서 말하는 중심이 생기는 거야. 그 고요로부터 시작하는 하루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