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위기란 말은 벌써 나왔습니다. 그 이유는 인문학이 지식의 교양을 위한 학문에 그쳤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문제를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적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그 알고있는 걸 활용해서 싸우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공존이 될 수 있는 처방이 아니라 차이가 갈등이 되는 교양무기가 되기때문입니다.
현실을 고치는 실용성을 떠나서 인문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인문학은 찌거기일 뿐입니다.
그런 차이가 갈등을 일으키는 가장 가까운 현장은 우리 몸입니다. 우리 몸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것들, 이전에 배웠던 앎들 새로이 들어온 앎들. 이전에 먹었던 음식들, 새롭게 먹은 음식들. 이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 해소되지 않는 갈등들이 충동이 되어 다른 사람과도 갈등을 일으킵니다. 자기 뮈욤이 조화롭게 운영되지 못하는데, 다른 관계에서 조화는 이루기 힘듦니다.
인문학의 실천적 문제는 처신의 문제입니다. 신의 운영체계를 어떻게 역설계하느냐. 어떤 신뢰자본을 자기 몸 안에서 구축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병원 비즈니스 종교에 세뇌되고 맙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종교는 기독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고 유고도 아닙니다. 그건 병원이라는 종교입니다. 스스로 자기 안에 중용을 찾지 못하고 병원이라는 종교에서 처방을 바라는 게 현대인입니다. 흰가운이 어느새 사제의 가운보다 더 큰 마력을 부립니다.
몸짓은 인문학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인문학입니다. 지식의 재주넘기가 아닙니다. 텅빈 지식이 아니기에 몸을 기반으로 합니다. 때문에 병원종교와 결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병원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내 안의 조화를 다른 누군가의 마법적 권력에 의탁하지 않는다는 결심입니다. 그래서 몸짓은 터 위에 하늘을 향해 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