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은 소학에서 환患이라 합니다. 이는 단지 심리적인 불안을 뜻하는 게 아니라 몸의 치우침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신체흐름의 불균형으로 마음(心)에 꿰여(串)있는 게 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심리적인 측면에 중점을 두고 대응하는 현대 정신학의 흐름과 사뭇 다릅니다.
몸의 치우침이 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생각해 보니 무감각해진다는 게 떠오릅니다. 감각이 딱딱해지고 마취된 것입니다. 감각의 역치가 올라가서 강한 자극이 아니면 감흥을 얻지 못합니다. 더 강렬한 맛과 움직임을 찾는 건 患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강한 감각을 찾는 건 언뜻 세련된 감각을 가진 것 같지만 저절로 드러나는 섬세함을 갖지 못합니다.
다음으로는 몸의 움직임 패턴이 꿰여(串)있기 때문입니다. 대개 그런 움직임은 걷는 걸로 표현됩니다. 발뒷꿈치부터 쿵쾅 쿵쾅 걷고나 터벅 터벅 걷습니다. 팔자걸음으로 걸어서 기운이 세어나갑니다. 몸 중심에서 힘이 나오기보다는 당장 쓰기 쉽고 감각적인 팔다리로 힘을 씁니다. 팔다리가 중심이 되다보니 몸 중심선도 흐트러집니다. 배보다는 눈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다 보니 거북목과 라운드 숄더, 측만증이 생깁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은 사실 사회문화구조때문. 그 이면에는 상징체계들이 있습니다. 어떤 걸 욕망해야 옳은 취향으로 여기는 숨겨진 정치입니다. 욕망하는 몸을 낳는 역학적 디자인이 있습니다.
거꾸로 몸의 패턴을 다시 정비하는 건 그런 상징계에 대해 반성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존재가 상징계를 떠나 살 순 없지만, 상징계에 매여 살 수도 없습니다. 매번 흐트러지지만 다시 중심을 셋팅하고 걷는 이유입니다.
射不主皮. 활을 쏜다는 건 과녁을 뚫기 위함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