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적으로 주어진 세계 속에서 판단하고, 감정을 느낍니다. 몸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앎에 대한 중독은 사람을 편벽되게 만듦니다. 몸의 움직임이 편벽되어 일상 쓰는 방식으로 씁니다. 거기에는 그 시대의 가치와, 그 시대의 아픔이 개인화되어 들어 있습니다. 개인화되어 있다는 것은 신체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해서 우리는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고통이라는 건, 주어진 세계관 속에서 주어진 판단과 감정을 재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과거에 비추어 투사를 끊임없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에 축척된 습들을 훈련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꺠달음enligtment 가 공공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누구나에게 가능한 공공재입니다. 즉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어떤 누가 사용해도 다른 사람도 역시 사용가능한 공공의 자원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게 어떤 신비한 능력이 아니라, 처신을 잘 하는 게 아닐까요.
즉 자기에게 주어진 세계관과 그 세계관으로부터 설정된 판단,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입니다. 자유롭다는 건, 그것들이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으로 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끼되 그 흐름을 보는 것입니다.
팔의 어느 부분이 간지럽습니다. 그 간지러움을 그냥 긁어서 해소할 수 있지만, 가만히 그 증상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느낌이었던 것이 점차 그 느낌의 질이 다양하고 폭이 다양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따끔거리기도 하고 달콤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다고 긁고 싶은 충동도 올라옵니다. 그 충동에 따라가기 보다 그 충동을 넉넉하게 느낍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 증상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체, 그리고 그 신체가 만들어 내는 느낌을 묶는 감정, 생각 등등. 또는 과거의 어떤 일로 인한 상처의 색체를 지닌 투사. 이것들은 불편한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플롯을 먼저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나를 두렵게 합니다. 그보다는 과정 안에 뭔가 있다는 것이 나를 더 흥분시키죠. 내가 원하는 것은 이야기를 찾기보다 디테일을 첨가하고 모아서 퍼즐이나 그 이야기를 구성하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 짐 자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