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7월 9일 이위종의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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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자.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다. 국사교과서에서 배운대로 신식 군대 별기군에 대한 반감, 그리고 상대적으로 가해진 구식군대에 대한 푸대접 아니 무대접에 분노한 구식 군대가 들고 일어난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민씨 가문의 집을 들부수고 이판사판이 된 그들이 찾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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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하라는 사람이었다. 흥선 대원군의 심복으로서 대원군 정권의 치안을 책임진 포도대장이었으며, ‘낙동 (그가 살던 동네 이름)의 염라대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었지만 대원군 실각 이후 끈 떨어졌던사람. 그가 이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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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서자가 이범진이라는 사람이고, 그 아들이 이위종이다. 국사 시간에 졸지 않은 이라면 이범진은 친러파의 대표인물로 기억할 것이다. 아관파천의 핵심인물이 그였다. 그리고 이위종이라는 이름은 조금 더 낯익을 것이다. 바로 이상설 이준과 더불어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고종 황제의 밀사로 파견된 3인 중의 하나다.
우리는 ‘이준 열사’의 이름 때문에 이준을 그 3인의 대표로 기억하지만, 사실 그 3인 중 정사(正使)는 이상설이었고, 이준과 이위종은 부사였다. 그리고 이위종이 나머지 둘을 만난 것은 러시아의 수도에서였다. 당시 러시아 주재 한국 공사가 이범진이었다. 이미 1905년의 을사조약으로 이범진의 외교관적 지위는 박탈당한 상태였으나 그는 공사관을 사수하고 있었다. 이범진은 나이 마흔을 넘어 외교관이 되었던 바, 그는 외국어에 능통하지 못했다. 그를 도운 것이 아들 이위종이었다. 그는 7개 국어를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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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에 세 헤이그 밀사가 헤이그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미 카쓰라 태프트 조약으로 조선과 필리핀을 교환한 미국도 그랬고 일본의 동맹국 영국도 그랬으며 이위종이 살았던 러시아도 그랬고 주최국인 네덜란드도 다르지 않았다. 헤이그 밀사는 국제 미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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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파송한 대한제국에서 그들에게 사형과 무기징역 선고(형식적일지언정)를 내릴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할까. 하지만 세 밀사는 어떻게든 이 난관을 뚫어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1907년 7월 9일 이위종은 열국의 기자들을 모아놓고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연설을 한다. 유창한 프랑스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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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들은 항상 큰 목소리로 얘기합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일본의 국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계 문명인으로서의 일을 하는 것이며, 개방정책을 유지하며 모든 국가에 동등한 기회를 보장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그들은 변합니다. 놀랍게도 원통하게도 그들은 모든 나라에 대한 정의롭고 평등한 기회 대신 추하게, 불의하게, 비인도적으로, 자기 욕심대로, 결정적으로 야만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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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 따르면 을사조약은 우호적으로 체결되었지만, 우의와 형제애를 말하면서 그 뒤통수를 치는 강도보다도 더 비열한 짓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아직 조직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토록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인 일본의 침략이 종말을 고하기 위하여 하나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일본은 반일정신으로 무장한 2천만 한국인들을 모두 죽여 없애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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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위종의 프랑스어 연설은 모여있던 기자들의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깐깐하고 의심 많기로 유명한 기자들이었지만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며 공감한다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자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리고 국제관계는 냉혹했다. 당장 이위종의 연설을 듣고 장문의 연설문을 협회보에 실어주었던 영국인 스티드부터 곧 밀사들을 외면하게 되니까.
뜻을 이루지. 못한 노여움으로 분사한 이준을 헤이그에 묻은 이위종은 1911년 아버지를 러시아에 묻어야 했다. 외교권을 빼앗긴 나라의 외교관으로서 군자금을 모아 의병들을 지원하고, 공관을 잃고 아파트로 들어가서도 대한제국 공사로서의 소임을 다하던 이범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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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조국 대한은 이미 죽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소인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 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소인은 자살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소인은 오늘 생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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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러파로 알려져 있으나 용암포를 조차하려는 러시아의 책동에 반발하여 관련 서류 제출을 거부하여 그것 때문에 문책까지 받았던 사람, 한때 친러파 동료였던 이완용이 후작 작위를 받고 유유자적하던 동안 황량한 러시아 벌판을 배회하며 잃어버린 나라를 찾아헤매던 이범진은 그렇게 죽었다. 유산 거의 모두를 독립운동에 쓰라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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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이위종의 말년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러시아 군에 입대하여 1차대전 중 동부유럽전선에서 전사했고, 가족들에게 전사 통보가 전해졌다는 설도 있고, 그 뒤 러시아 혁명에 가담했고 러시아 거류민들 앞에서 붉은 군대의 장교로서 "조선의 독립을 도울 것은 러시아"라고 주장한 '이위청'이 그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은 나이 스무 살에 서양인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유창한 외국어로 자신의 나라를 도와 달라고 외치던 1907년 7월 9일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