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제비오를 추억하며
2014년 1월 5일 검은 표범’ 에우제비오가 죽었다. 한때 ‘유세비오’라는 까닭 모를 발음으로 불리우기도 했던 불세출의 축구 천재가 현세의 그라운드를 떠났다. 1966년 영국 월드컵 때 북한과의 경기에서 3대0으로 뒤지고 있었던 경기를 홀로 뒤집은 전설은 월드컵 대회가 열리는 한 계속 운위될 것이다.
‘검은 표범’이라는 별명은 말할 것도 없이 그가 흑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르투갈의 식민지 모잠비크 출신이었다. 고향에서 공을 차다가 브라질 출신의 명감독 바우어의 눈에 띄었고 공 잘 차고 재빠른 흑인 소년은 포르투갈 리그에 스카웃된다. 식민지를 영구 지배하기 위해 모잠비크 사람들에게 ‘포르투갈 공민권’을 부여(?)한 상황이었기에 식민지 소년의 포르투갈 유입은 어렵지 않았다. 이 와중에서 포르투갈의 프로팀 라이벌 스포르팅 리스본과 벤피카 사이에 엄청난 스카웃 전쟁이 있었고 벤피카는 에우제비오를 납치해서 계약을 성사시켰다는 후문까지 있었다.
아직 십대를 벗어나지 못한 어린 나이에 그는 대형 사고를 치며 스타로서의 떡잎을 유감없이 과시한다. 1961-62 유러피언 컵에서 소속팀 벤피카는 스페인의 독보적 팀 레알마드리드와 맞붙는다. 이때 레알 마드리드의 주전 공격수는 또 하나의 전설 헝가리의 푸스카스였다. 푸스카스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 공격을 이끌었고 3대3의 팽팽한 대전이 펼쳐졌는데 이 경기를 매조지한 것이 바로 에우제비오였다. 3분 사이에 두 골을 터뜨려 버린 것이다. 5대3. 경기가 끝난 뒤 푸스카스는 십대의 어린 표범 에우제비오를 찾아 유니폼을 건넨다. 50년대의 영웅이 60년대의 초보영웅에게 왕홀을 전달하는 듯했던 순간.
뭐니뭐니해도 그의 무대는 66년 영국 월드컵이었다. 당시 북한은 기적이 아니라 실력의 축구팀이었다.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초반 북한의 움직임은 신기에 가까웠다. 하지만 북한의 천리마는 에우제비오라는 재갈에 물려 무릎을 꿇고 말았다. 에우제비오 본인 그 경기를 자신의 인생 최고의 경기로 꼽았거니와 북한은 월드컵 4강 신화를 한 발 앞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북한은 이스라엘 (북한과 감정이 좋을 수가 없는) 심판 때문에 페널티킥이 두 개나 주어졌다며 볼멘 소리를 했지만 경기를 다시 보면 에우제비오의 돌파를 못이긴 북한 수비진의 어쩔 수 없는 반칙이 맞다.
포르투갈 국기를 달고 뛰긴 했으나 에우제비오의 소회는 복잡했을 것이다. 그는 벤피카의 ‘축구 노예’였다. 그의 활약에 놀란 많은 프로팀들이 거액을 아끼지 않을 태세가 돼 있었지만 그는 벤피카와의 장기 계약에 짓눌려 단 한 번도 이적하지 못하고 15년간을 벤피카에서만 뛰었다. 서른 중반이 돼서야 벤피카는 그를 놓아 줬고 축구 불모지 미국에 가서 뛰다가 축구 인생을 마감했다.
.
그리고 그가 한창 포르투갈 리그에서 줏가를 올릴 때 고국 모잠비크는 포화에 휩싸여 있었다. 그가 포르투갈에 올 때쯤 이미 모잠비크 해방 전선이 결성됐고 1964년 9월에는 포르투갈 군대와 충돌하면서 본격적인 무장 항쟁을 시작해던 것이다. 포르투갈은 7만 명의 대군을 파견하면서 모잠비크의 저항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그런데 이 모잠비크의 독립 투쟁을 적극 고무하면서 물심양면에서 지원했던 나라가 북한이었다.)
마침내 포르투갈에서 좌익 쿠데타가 발발한 후에야 모잠비크의 독립은 이루어졌다. 1975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해에 에우제비오도 벤피카와의 장기 계약에서 벗어난다. 묘한 우연의 일치. 그는 북미 프로 축구리그에 건너가서 1980년대 초반까지 그라운드를 누비다가 은퇴한다. 벤피카 스타디움에 그의 동상이 서 있고 그의 사망 소식 이후 꽃다발이 쇄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검은 표범 에우제비오는 그 꽃다발에 감사만 할지는 모르겠다. 그의 축구 인생에도 식민과 피식민의 아픔은 아로새겨져 있고 벤피카가 그를 붙들어맸던 15년의 세월은 그에게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을 것이기에. 검은 표범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