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6월 2일 루 게릭 사망
근위축성측삭경화증 . 발음조차 어려운 이 병은 근위축, 근력 약화, 근섬유속연축 등의 현상이 나타나는 퇴행성 신경계 질병이다. 대뇌 및 척수의 운동신경세포가 점점 쇠퇴해져 처음에는 손가락과 손, 그리고 다리의 근육이 가늘어지고 퇴화되다가 음식물조차 넘기기 힘들어지고 일어설 수조차 없게 되고 각종 합병증으로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병은 병의 본명의 약칭인 ALS나 ‘근위축성측삭경화증’보다는 ‘루 게릭 병’으로 대중에게 더 친숙하다. 그리고 루 게릭은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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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왕 베이브 루스처럼 그도 독일계 미국인이었다. 루 게릭은 태어날 때부터 떡잎을 알아볼만한 위용을 보인다. 무려 6.4 킬로그램의 거대아였던 것이다. 야구부터 미식축구까지 모든 운동을 섭렵했지만 역시 발군의 재능을 발휘했던 것은 야구였다. 양키스 스타디움이 개막되던 날 열린 경기에서 그는 고등학생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파워를 발휘하여 만루 장외 홈런을 날려 버린다. “저거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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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시즌 중간에 뉴욕 양키스에 입단했고 처음에는 대타 요원으로 반짝 활약을 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1925년 6월 1일 역시 대타로 출전하면서 대기록의 첫발을 잡는다. 그 다음날이 6월 2일, 양키스의 매카시 감독은 대타 요원인 게릭을 정규 출전 선수 명단에 올린다. “1루수 윌리 핍이 두통이라는군.” 그렇게 양키스의 1루수 자리를 꿰찬 루 게릭은 그로부터 2130경기 연속 출전이라는 전인미답의 금자탑을 쌓게 된다. 수십년 후 또 하나의 철인 칼 립켄 주니어가 그 기록을 넘어서기 전까지 누구도 넘보지 못한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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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출전만 한 게 아니라 그는 타자로서 대단한 활약을 했다. 홈런왕 베이브 루스와 한 편에 있었던 관계로 항상 2인자 격에 머물러야 했지만 그는 다른 팀의 한 시즌 통산 홈런보다 더 많은 홈런을 때려내는 홈런 타자였고 루스에 비해 홈런은 적었지만 타율은 더 높았다. 특히 한 게임에 4개의 홈런을 때린 것은 20세기의 메이저 리그에서는 그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승승장구했지만 뒤안의 아픔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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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의 공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고도 경기를 치러야 했고 첫 타석에서 안타를 치고 바로 대주자로 교체된 뒤 병원으로 실려간 적도 있었다. 후일 그가 엑스레이를 찍어 봤을 때 골절 됐다가 자연 치유된 흔적이 열 군데가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진짜로 심각한 병마가 그를 덮쳐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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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게릭의 몸에 뭔가 이상이 생긴듯 하다. 몸 상태가 나빠진 원인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게릭이 야구만 할 수 있다면 나는 기쁠 것이다.” (제임스 칸 기자) 분명히 잘 맞은 타구가 플라이가 됐고 달리는 다리에도 힘이 빠지는 것이 역력했다. 슬럼프인가. 그러나 단순한 슬럼프만은 아니라는 것을 게릭 자신이 먼저 알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부진에 구단 측은 감독에게 게릭을 후보로 돌리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조 매카시 감독은 이에 저항했고 동료 선수들도 열심히 게릭을 도왔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한계를 폭로한 것은 게릭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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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 오늘은 벤치에 있을게요.” 1939년 5월 2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전에서 게릭은 조 매카시 감독에게 말한다. “그게 팀을 위한 일이라면 그렇게 하지.” 그리고 루 게릭의 이름은 출전 선수 명단에서 빠진다. 선수 명단을 받아든 심판진도 경악했고 이윽고 장내 아나운서가 루 게릭의 기록이 오늘로서 현재 진행형이 아닌 과거의 역사로 편입됨을 알린다. 그리고 전 관중을 기립 박수로 역사의 탄생을 축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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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마’ (게릭의 별명)는 더 휘청거렸고 아내와 함께 찾은 병원에서 ALS 진단을 받는다. 길어봐야 3년이라는 진단과 함께. 이윽고 뉴욕 스타디움에서는 대기록의 주인공이자 양키즈최초의 영구 결번의 주인공 루 게릭의 은퇴식이 열린다. 거기서 게릭은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잊지 못할 연설을 한다.
“팬 여러분, 지난 2주 동안 제가 앓고 있는 질병에 관해서 들으셨겠지요. 하지만 오늘, 저는 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운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야구장에서 17년이나 뛰었고 팬 여러분들로부터 친절과 격려만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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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대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당신들 중 누가 그들과 함께 한 일생의 찬란한 순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저는 운이 좋습니다. (중략)
자신의 딸이 사위와 말다툼을 할 때도 사위편을 들어주는 멋진 장모가 있다면 그것은 멋진 일입니다. 당신을 가르치고 키우기 위해 평생을 바친 부모님이 계시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힘의 근원이 항상 되어주고 당신이 가능하다고 꿈꿨던 것보다 더 많은 용기가 생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아내가 있다면-그것은 제가 아는 최고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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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저는 고통스러운 질병을 앓고 있지만,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 말씀드리면서 연설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좀 방탕한 삶을 살았던 베이브 루스와는 달리 그는 모범적인 가장이었고 성실한 야구선수였다. 그것은 치명적인 병을 맞아서도 마찬가지였다. “절망하거나 내가 처한 현실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 가능한 한 오랫동안 버텨낼 것이다. 차후에 죽음이 다가와도 묵묵히 받아들일 것이며 더 나은 상황이 올 거라는 희망도 품을 것이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라고 그는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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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은퇴 후 맡은 일은 뉴욕시 가석방 감독관이었다. 그보다 열 배는 돈을 더 벌 수 있는 유료 강연이나 기타 일을 그는 전부 사양했다. “일반 시민에게 봉사할 좋은 기회”라는 이유로. 그는 서명이 힘들어지자 아내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까지 그 일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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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41년 6월 2일. 그가 대타 요원이 아닌 정식 출전 선수로 경기장에 섰던 날로부터 꼭 16년째 되는 날 루 게릭은 세상을 떠난다. 인간을 넘어선 철인(鐵人), 육체의 한계 뿐 아니라 인간의 의지의 절정을 보여준 철인(哲人)의 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