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외연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기를 강요받고 있는가?
얼마 전에 아이돌 그룹 ‘샤이니’의 멤버 종현이 자살했다. 그의 죽음 이후에 인터넷엔 추모글이 들끓었지만 실상은 그는 ‘불행해선 안 될 사람’이었다. 연예인이었고, 제법 돈을 벌었으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그의 유서에서도 나왔듯, 상처를 치료해야할 상담자조차 그의 불행을 이상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어쩌랴, 그는 스스로 불행했다.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에겐 그만의 고뇌가 있었을 거다. 하나의 아티스트로 인정받고자 하지만 그에게 씌워진 ‘샤이니 종현’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을거다. 그런 내적인 고뇌가 있었는가하면, 공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부담이나 박탈된 개인의 자유에 대해 괴로워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스스로 불행했음을 밝혔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이라는 방법을 선택했다. 아마 그가 살아있는 채로 ‘나는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껍데기를 쓰고 산다.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사회를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처한 위치나 상황에 따라 어떤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가령 내가 어떤 직장의 말단 사원이라면 나는 말단 사원의 탈을 써야 하고, 누군가의 애인이라면, 그녀의 애인이라는 탈을 써야하고, 누군가의 자식이라면 그의 자식이라는 탈을 써야하고, 내가 누군가에게 누군가라면, 그 누군가라는 탈을 써야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탈이 너무 고착화된 나머지 탈 뒤에 숨은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는데 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 자신을 도야하기 위해 기꺼이 탈을 쓰는 경우도 있겠지만(예컨대 수양을 위해 승려가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는 것. 또한 그러한 모습을 보고 양손을 모으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이 아니며, 설령 자신의 것이라 할지라도 외연은 피로를 불러온다. 예컨대 봉사하는 마음이 나의 기쁨이며 내가 추구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의 봉사에 기대어 모든 것을 내놓으라는 사람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하면 결국 내 삶이 피폐해지고 만다. 외연은 ‘나의 가능함’을 쉽게 드러내지만, 그만큼 그 외연을 읽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인간들의 폭력도 동반한다. ‘잘난 탈’을 쓴 사람은 잘난 대로 피곤하고, ‘못난 탈’을 쓴 사람은 못난 대로 피곤할 수밖에 없다.
섣불리 뱉어버린 ‘~답다’라는 말처럼 쓰레기 같은 말이 또 있을까. 당신이 누군가를 ‘~답네’라고 해버린 순간 그는 적어도 당신 앞에서는 그렇게만 살도록 강요받는다. 어울리지 않는 표정과 행동을 하느라 지쳐버린 영혼이 어느 순간 비명을 내지르면, 그건 발작처럼 여겨지고 일종의 혐오마저 부른다. 그런 모습이 ‘나’라고 소개한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외연을 완전히 배척하라는 말이 아니다. 단지 사람들이 쓰고 있는 외연이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외연을 무시하면서 산다면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가령 경계근무를 서는 군인이 ‘나는 군인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야!’라고 하면서 근무지를 이탈한다면, 경계 영역 전체가 무의미해지고 쳐들어온 적군에게 아군이 몰살당한다. 이는 결국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군인은, 군인의 역할을 다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군인이 군인이 아니게 될 때는 어떤가? 그는 그일 뿐이다. 저녁에 소파에 앉아 맥주 한 잔 걸치면서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순간까지 시퍼런 상무정신을 강요하는 건 억압이다. 그가 낮에 군인이었다는 이유로 군인처럼 살아야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같은 이치로 우리는 모든 외연에 대해, ‘아니라면’을 덧붙일 수 있다. 그 혹은 그녀가 ‘내 부하 직원이 아니라면’, ‘내 상사가 아니라면’, ‘내 부모가 아니라면’, ‘내 자식이 아니라면’, ‘내 애인이 아니라면’ 우리가 정의하는 모든 껍데기에 ‘아니라면’을 붙여보면 우리 스스로 꽤 겸허한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외연을 벗겨버리면 그는 한 사람에 불과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 보면 유일한 차이는 생각의 차이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생각이 훌륭한 인간은 미천한 곳에 있어도 우러러 볼 수 있는 것이고, 생각이 비천한 인간은 넉넉한 곳에 있어도 하찮게 보이는 것이다.
종현을 ‘샤이니 종현’이 아닌 그저 음악 좋아하는 ‘종현’으로 바라보았다면 그는 자살하지 않았을까. 역시 그건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에게 씌워진 외연의 주박은 너무도 컸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샤이니’처럼, ‘인기 연예인’처럼 행동해야했을 테니까.
외연은 그야말로 껍데기일 뿐이다. 모두의 삶을 위해 각자는 정해진 외연을 쓰지만, 그것이 그의 모든 인생이라고는 하지 말자. ‘외연 벗기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부정한 것들은 꽤나 사라져 버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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