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중독 20. 사람에 대하여 - 무엇이 인간을 사람으로 정의하는가? (2) -후편-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사회에 소속된 이들은 첫 번째 기준-동물적인 본능을 억제할 수 있는-을 충족한다. 개중엔 이를 교묘히 숨기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를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는 사람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일 뿐이고, 인격체로 대할 이유가 생겼다는 것일 뿐, 대화할만한 상대인가 하는 점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을 구분하는 두 번째 기준이 필요하다. 그 두 번째는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인가’하는 점이다. 우주를 비롯한 물질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런 뜻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 태양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리고 왜 하필 태양계엔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순의 행성들이 나열 돼있는지, 혹은 사계절이 왜 존재하는지, 그런 것에 사실 이유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이러한 일들에도 이유를 부여한다. 비록 말이 안 될지라도 말이다.
일단 현상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건, 현상에 의문을 갖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폭풍이 몰아친다는 것에 대해 ‘신이 노했다’고 표현했다. 어떤 이들은 ‘폭풍이 불어서 괴로운데, 이 폭풍은 왜 부는 것일까?’라고 생각했다. 전자는 점점 발전해서 예술적 영역으로 나아갔고, 후자는 점점 발전해서 과학의 영역으로 나아갔다. 어쨌거나, 현상에 대해서 의미룰 부여하고자하는 이들은 방범에 차이가 있을 뿐, 필연적으로 의문을 가지고 현상을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의미를 부여한다는 건 사람과 동물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일단 언어라는 것 자체가 의미부여 그 자체다. 그저 어떤 형태에 불과한 자음과 모음들을 합쳐서, 또 그 합친 어떤 글자들을 지칭해 어떤 사물이라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들을 합쳐서 어떤 의미가 있는 문장들을 만들고, 이런 의미작용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보다 고차원적인 사고를 만들어 낸다. 이 고차원적인 사고들이 적층되면 비로소 지식이 된다.
그러므로 특히 ‘사람’이면서도 훌륭한 사람은 의미부여를 할 줄 알고 이것의 가치를 아는, 의미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현재 밝혀진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은 해박한 사람이 되고, 미래까지도 내다보는 사람은 통찰력 있는 사람이 된다. 이미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모든 현상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서 능히 어떤 질문을 가져와도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현인의 경지에 이른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마땅히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제자를 자처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나아가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도 그 스스로가 의미가 되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위버멘쉬이거나 철인이거나, 군자내지는 성인이다. 물론 여기서 의미를 부여한다는 건 그것이 진실일 경우에 한해서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드문 경우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영역은, 최소한 ‘의미를 부여할 줄은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건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 아니다. 하다못해 내가 오늘 생일이어서 받은 생일케이크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는 정도로도 의미는 부여한 셈이다. 생일케이크엔 너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의미가 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의미에 기뻐하고 감사하기 때문이다.(단, 헤어진 애인 등이 보낸 생일케이크는 예외로 하자. 그러나 사람이라면 어쨌든 이 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한 이유도 없는데 생일 케이크를 받자마자 배가 부르다며 버리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이것은 예의의 범위에 속하는데, 예의 갖춘다는 것 또한 상대가 보여준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반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의 최소한의 기준은 자신이 하는 행위(케이크를 받은 것에 고마워하는)에 대해 이유(나의 존재함을 기뻐하다)를 알고 의미를 부여(선물한 당사자가 나에게 친애를 가지고 있다)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내가 뭔가를 하는데 왜하는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하기는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지 말할 수도 없다면 그건 온전한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건 특히나 부당함을 바라보는 시선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부조리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불합리함에 대한 의미를 알고 이것이 자신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는지 분명히 자각하고 있다. 그러나 의미를 부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러한 일들이 있다고 해도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는 사람이기는 해도 ‘노예 상태’에 처해있으며, 생각보다 많은 대중들(정적대중, 혹은 das man)이 이와 같은 상태에 놓여있다. 그들은 자신의 불평등을 자연스럽고 불가역적인 것으로 믿거나, 혹은 비윤리적인 행태들이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을 경악할 현실로 내몰 수 있다는 것도 모르거나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예컨대 아동포르노를 시청함으로써 생긴 수요가 어떤 아동들을 매춘 소굴에 밀어 넣을 수 있다는 사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사람의 최소 요건은 충족했지만, 현상에 대한 의미부여가 잘되지 않는 이들을 벗 삼으라 한다면, 그건 곤란할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이런 이들조차도 벗 삼을 수 있지만, 그건 앞서 언급했듯이 무엇이든 알려줄 수 있는 ‘현인의 경지’에 올라서 그 누가 되었든 동등한 수준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결국 의미를 부여한다는 건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다. 인류를 발전케 하는 이들 모두 ‘의미 부여에 탁월한 대가들’이라는 사실쯤은 쉬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이나 도스도옙스키나 그 방향이 다를 뿐, 두 사람 모두 의미를 부여하는데 천재적인 재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아인슈타인이 시공간의 개념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만약 도스도옙스키가 사형대에서 인간의 양면성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우리가 더욱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면 부지런히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자. 고로 나는 이러한 일에 열성인 사람을 더욱 사랑할 것이며, 나 또한 그러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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