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글이 써지지 않아 쓰는 글

Words
856
Reading
4 min
Listen
Play
8y



하락장에 스팀잇을 더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건만 부끄럽게도 좀처럼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사실 지난 1주일 동안 좀 바빴다. 지난주와 이번 주 월요일에는 회식이 있었다. 우리 회사가 투자했던 자산을 올해 초에 판 것을 축하하기 위해 중개인 역할을 한 뱅커들이 마련한 자리였다. 오래간만에 남의 돈으로 칼질을 하고 메뉴판으로만 구경하던 와인을 마셔보는 허세를 부릴 수 있었지만, 옆에 앉은 사람들과 기억에 남지도 않을 뻘소리를 (심지어 영어로) 3시간 동안 하고 집에 오니 도저히 글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주중 아침에는 오랜만에 운동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원래 회사에 출근하기 전에 글을 쓰는 편인데 헬스장에 사람이 없는 아침 시간대에 운동을 하려니 자연스럽게 글쓰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자마자 쇠질을 하고 퇴근을 하니 온몸이 쑤시고 피곤이 몰려와 컴퓨터 앞에 눈을 뜨고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삶은 선택과 포기의 연속이라더니 모든 것을 다 가지는 방법은 없나 보다.

여름이 시작되니 주말에 파티나 술자리가 부쩍 늘어났다. 금요일 저녁에는 와이프와 함께 오랜만에 외식을 했다. 토요일 아침에는 한국이 월드컵 예선전을 탈락하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고, 저녁에는 친구들과 모여 술판을 벌이고 뉴욕식 평양냉면을 먹였다. 일요일에는 집을 정리하고, 새로 끓일 냉면 육수를 위한 장을 보고, 조금 쉬다 보니 다시 월요일을 준비할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주말이 또 스쳐갔고 글을 쓰지 않은 하루도 또 지나갔다.




바쁘긴 했지만 조금 더 솔직히 얘기하면 글을 쓸 시간 정도는 어떻게든 짜내서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 보니 관성이 작용해 글을 쓰는 것이 더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일!"을 외치며 포스팅을 미루다 보니 다음 글은 더 완벽하게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더 완벽한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조건 하루에 원고지 20매씩을 규칙적으로 쓴다고 한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잘 안 된다 싶어도 어떻게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쓴다는 것이다. 너무 기계적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글을 못 쓰게 되는 '작가의 블록'이 찾아올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나 자신을 하루키 같은 대 작가와 비교하는 것도 우습지만 이렇게 가다간 예전에 야심 찬 마음으로 브런치를 시작했다가 결국 무기한 휴재에 들어간 것처럼 스팀잇과 이별을 고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기계적일지라도 오늘 아침에는 꼭 글을 쓰리라 다짐했다. 평소보다 1시간 정도 일찍 알람을 맞췄고, 거실로 기어 나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하얀 스크린 깜빡이는 커서를 보자 두려움이 앞섰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예전에 싸이월드나 페이스북에 글을 쓸 때는 이 백색 화면이 참 반가웠다. 아무 생각 없이 노트북을 바라보다 떠다니는 여러 생각을 의식의 흐름에 맞긴 채 배설하는 정신적 제설작업이 너무 편하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날이 좋아 와인이나 위스키라도 한잔 걸치면 내면에 몰입하여 키보드를 두드리며 머릿속에 엉켜있는 생각들을 자유롭게 쏟아 낼 수 있었다. 심연의 바닥까지 내려간 뒤 다시 표면 위로 올라와 고개를 들면 사우나라도 다녀온 듯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브런치나 스팀잇은 이런 괴상한 취미를 재능으로 살릴 수 있는 훌륭한 플랫폼이었지만 단점도 있었다. 무대 위에 올라오니 의도치 않게 몸에 더 힘이 들어가게 되었다. 이전에는 각본 없이 내뱉는 아무말 대잔치를 독백을 즐길 수 있었다면 이제는 단상 위에 서서 주제를 잡고 연설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의도치 않게 몸에 힘이 들어가니 생각이 쉽게 빠져나오질 못했고, 못 뱉은 생각은 마음속에 응어리 진채 더 엉켜만 갔다. 내 삶의 어땐 때보다 더 글을 많이 적어갔지만 역설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더 못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여기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는 공간이니 내 일기장처럼 글을 휘갈기는 것은 힘들 거다. 만약 진정한 자유가 목적이었다면 에버노트에 적은 이 글들을 발행하지 않고 내 서랍 속에 간직하면 된다. 하지만 세상의 많은 것들이 그렇듯 자유를 얻는 대신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생긴다. 스팀잇의 경우 발생하는 약간의 보상과 내 생각에 공감을 해주시는 분들의 관심, 그리고 이 공간을 통해 만날 수 있게 된 세계 곳곳의 스티미언들과의 교류가 있겠다. 누구에겐 별것 아닐지도 모르나 나에게는 내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인 만큼 나는 이 소소한 행복들을 포기하고 싶지가 않다.




시답지 않은 글이지만 여기까지 적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중간에 당이 모자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나 싶어 밥을 데워 먹기도, 또 김 작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무의식에 의지한 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번뇌이는 아이디어나 기똥찬 문구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스팀잇에 찍히는 보팅이 보상이라기보다는 점수표라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인지 높은 보팅과 보상을 기록하는 글이 많이 질수록 다음 글도 홈런을 쳐야 된다는 생각에 쓸데없이 힘이 더 들어간다. 강남 스타일 이후 커리어의 가장 큰 슬럼프가 찾아왔다고 고백하는 가수 싸이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홈런을 그리다가는 안타는커녕 다시는 방망이를 휘두르지도 못할 것만 같아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타석으로 올라와 이 글을 날려본다. 오늘은 삼진일 수도 있지만 스윙을 하지 않는다면 홈런도, 안타도, 그리고 삼진도 나올 수가 없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너무 작은 것들에 연연하지 말자. 작은 것에만 집착하다 보면 큰 것을 놓치게 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일수록 초심을 되짚어 보는 것이 좋다. 나는 내가 왜 스팀잇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기억해본다. 그리고 가입인사에 담았던 그 마음을 절대 잊지 말자고 오늘도 다짐한다.

스팀잇만큼 어려운 것도 없지만 또 쉬운 것도 없다. 스팀 가격을 올리는 방법은 모르겠지만 스팀잇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다른 스티미언들을 돕자.

더 단단한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 스팀잇에 공헌을 하자.

스팀 블록체인의 힘을 믿고 내 시간과 돈을 투자하자.

이 네트워크는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니 즐기자.

결국에는 마지막 말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추신: 스달이 드디어 $1 가까이 떨어져 가입 때부터 벼르고 있던 100% 스파 보상을 채택했다. 어려운 때이지만 피드에 파란 물결의 등불이 많이 보인다. 어두운 밤일 수록 밝은 별은 더 빛난다. 내 작은 등불이 많은 스티미언들의 길을 밝혀주는 북극성이 되었으면 한다.

[단상] 글이 써지지 않아 쓰는 글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