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지만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경계에서 K에게 달려가는 마음 하나가 있었다. M의 의식은 포기하지 않고 K주변을 꿀벌처럼 맴돌았다.
K는 샹젤리제 거리에서 마음껏 윈도우 쇼핑을 한 후 조지V 지하철 역에 도착하고 나서야 지갑을 도둑맞은 것을 발견했다. 얼마나 당황했던지 가방 안에 있는 잡동사니들을 바닥에 쏟았다. 마침 지하철 계단을 내려오던 한 중년부인이 그것들을 주워서 K에게 내밀었다. K는 부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지하철역 계단을 다시 걸어나왔다. 그녀는 숙소까지 걸어가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M은 K와 함께 생 폴 역 근처에 있는 민박집까지 걸었다.
K를 발견한 후 5분이란 시간은 족히 흘렀을 것이다. M은 이제 시간여행회사에서 지정해준 예약시간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느새 하늘에서 핑크빛 노을이 커튼처럼 내려왔다.
한인민박에 도착한 K는 많이 지쳐있었다. 그녀는 한식으로 제공되는 저녁밥을 먹는둥 마는둥했다. K는 같이 맥주나 마시자는 민박집 식구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후 한국에 있는 젊은 M과 통화를 했다. 젊은 M은 감자를 깎다가 감자칼을 내던지고 K의 전화를 받을 것이다. 통화를 마친 K는 곧바로 잠이 들지 못하고 한참 뒤척이더니 겨우 잠들었다.
M의 의식은 불꺼진 방에서 K와 함께 있었다. 더이상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좀 놀라웠다.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보는 일이었다. M은 마르지 않은 K의 머리카락이 베개에 서서히 검은 물자국을 남기는 것을 지켜보았다. 물자국은 다시 서서히 희미해져갔다.
새벽이 방안으로 새어들어 왔다. 겉커튼 밖에 숨어있던 레이스 무늬가 물결처럼 떠올랐다. M은 그 과정을 난생 처음보는 장면인 것처럼-실제로 그랬다- 찬찬히 감상했다. 창 밖의 새소리와 조심스럽게 달그락거리는 식기소리와 달궈진 팬에 야채가 구워지는 소리도 들었다. M은 잠든 K를 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의식의 상태로만 유지된다면 K가 늙어가는 것을 다시 봐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미 봤던 아주 긴 드라마를 다시 한 번 느린 속도로 보는 것 같을 것이다. 분명히 M이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M은 시간여행회사를 찾아갔던 일에서부터 지금까지 발생한 일을 돌이켜보았다.
그 블랙홀같은 곳에서 빠져나온 건 천만다행이었어. 그런데 어떻게 거기에서 나오게 된 거지?
M은 깜깜한 암흑 속에 있을 때 원하는 것을 가상의 형광펜으로 적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 작업이 어떤 작용을 해서 자신을 K에게 데려다 준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른 것도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M은 K에게 닿고 싶었다. 손을 잡고 얘기도 하고 무엇보다 머리카락을 좀 쓸어주고 싶었다. 잘 때 머리를 만져주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M은 끝을 알 수 없는 검은 도화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상상했다. 그리고 푸른 형광펜으로 자신의 마음을 적어나갔다.
K와 다시 한 생을 살고싶어. 포기하지 않을 거야. K와 다시 한 생을 살고싶어. 포기하지 않을 거야. K와 다시 한 생을 살고싶어. 포기하지 않을 거야. K와 다시 한 생을 살고싶어. 포기하지 않을 거야. K와 다시 한 생을 살고싶어. 포기하지 않을 거야. K와 다시 한 생을 살고싶어. 포기하지 않을 거야. K와 다시 한 생을 살고싶어. 포기하지 않을 거야.
머리끝에서 강력한 에너지를 느꼈다. 그는 다시 소용돌이치는 깔대기가 되었고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회전이 완전히 멈추었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쏟아지는 직사광선이었다. 눈이 부셔서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때 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 손을 얼굴에 가져갔다. 그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기뻐했다. 물론 발도 있었다.
눈 앞에는 끝없는 펼쳐진 사막이 있었다. 어딘가 경비행기가 추락해있고 어린왕자가 나타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풍경이었다.
M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방향을 봐도 황금빛 모래밖에 없었다. 그는 소리쳤다.
"누구 없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알몸으로 사막 한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