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zoya
“자네, 이것 좀 보게.”
파커 씨의 심각한 얼굴을 본 건 다음 날이었다. 그의 굵직한 검지가 가리킨 곳에 커피 원두를 담은 밀폐 용기가 있었다.
“뚜껑 닫는 걸 또 잊었군.”
마지막으로 쓴 사람이 나였기 때문에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파커 씨의 훈계가 곧장 이어졌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지. 허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아무나 못 하더군. 사람의 품질은 거기서 차이가 나지.”
“겨우 두어 번인데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나는 볼멘소리를 냈다. 자격지심이 부추긴 가벼운 저항이었다. 파커 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인생에서 엄청나게 큰 실수를 저지를 일이 얼마나 된다고 보나? 그런 실수를 당할 확률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지. 분명한 건 비일비재하진 않다는 게야. 인생은 사소하고 소소한 일들의 연속 아닌가. 일상이 축적되면 인생이 되지. 겨우 뚜껑 한 번 안 닫은 걸로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느냐고? 자잘한 실수를 우습게 보지 말게. 사람이 도모하는 일의 성패는 다 거기 달렸으니까. 아무리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도 자질구레한 실수가 잦으면 남들 눈엔 덜렁이로밖에 안 보이는 법이지.”
파커 씨는 잠시 말을 끊었다. 내가 귀담아듣나 안 듣나 확인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베트남에 어떻게 간 줄 아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원했지. 그때 여기는 반전주의자로 가득했지. 이상한 꼬라지로 사랑이니 평화니 부르짖는 부류들 말이야. 난 그들을 조롱했지. 애국심도 없고 신념도 모르는 겁쟁이들이라고. 믿기지 않겠지만 그땐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지.”
나는 딱히 안 믿기진 않는다고 토를 달려다가 그만뒀다.
“베트남에 도착해서야 알았네. 그들이 옳았음을. 내가 겁쟁이라고 모욕했던 그들이 옳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네. 셀 수 없이 많은 전우를 보내고 나서 얻은 뒤늦은 깨달음이었지.”
파커 씨는 감상에 젖어 소회를 털어놓았지만 나는 그 이야기가 다소 피상적으로 느껴졌다. 애초에 애국심이라든지 신앙심이라든지 하는 불필요하게 과장된 감정에 비웃음을 아끼지 않았던 나로서는 진부한 교훈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파커 씨의 진짜 본론은 그게 아니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네. 겪어 봐야만 일의 전말을 깨닫는 사람과 겪어 보지 않아도 그 이면까지 꿰뚫는 사람. 겪어 봐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네만 일단 논외로 하세. 나는 전자에 속한 사람이었지. 한마디로 어리석었어. 그래서 결심했지. 실수로부터 배우자,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만은 없도록 하자고.”
“그래서…… 성공하셨나요?”
파커 씨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왜냐고 묻기도 전에 파커 씨가 말을 이었다.
“그랬다면 마누라와 이혼도 안 했겠지. 그래도 최소한 같은 실수는 안 하려고 노력 중이네.”
“재혼하셨었어요?”
“내 말 못 들었나? 같은 실수는 안 한다니까. 내 머리에 지혜가 좀 더 담겨 있었다면 애당초 결혼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거야. 그 사람이 나쁘단 얘기는 아니니 오해하지 말게. 오히려 나한텐 분에 넘치게 좋은 여자였지. 애들한테도 좋은 엄마였고.”
파커 씨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변명을 덧붙이고는 자신이 생각해도 멋쩍었는지 큰소리로 목청을 가다듬었다.
“내가 보기에 자넨 선견지명이 있어. 타고난 자질이지.”
“제가요?”
“그래. 아직 충분히 길러내지 못했을 뿐이지.”
“그랬으면 좋겠네요. 갈수록 사는 게 힘들어지고 있거든요.”
“일단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게.”
수지 큐와의 지난날에서 내가 반복했던 실수는 무엇일까. 나는 모른다. 지금 와서 물어볼 수도 없다.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줘야 하나? 헤어지면 집에 잘 들어갔는지 꼬박꼬박 물어보고, 잠들 때까지 아무 말이나 속삭여 줘야 하나? 가고 싶다는 곳은 취향에 맞지 않아도 같이 가고, 먹고, 보고, 들어야 하나? 의구심이 들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나는 너무 독립적인 개체가 아닐까. 타인의 도움 없이 단 1분도 살 수 없었던 시간에 대한 반작용일까. 그렇다면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된 게 아닐까. 아니 애초에 준비될 수 있는 인간이긴 한 걸까.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수지 큐는 지금의 내가 좋다고 했다. 굳이 바뀌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결국 그런 나와 파국을 맞지 않았던가. 내가 변화해야 함은 자명한 일이다. 문제는 단지 클레어,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면 초점이 빗나갔다는 것이다. 내 변화는 훨씬 근본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
그녀는 나와 잘 맞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쩐지 그녀를 생각하면 맞고 안 맞고를 따지는 일은 1차원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차원에서 그녀와 나 사이에 일어날 일이 정해져 있는 것 같달까. 내가 그토록 혐오하는 운명이라는 이름을 빌려서 말이다. 사랑에도 이유를 찾는 나는 구제불능이리라. 그렇다 해도 고작 누구나 다 하는 시시한 연애를 위해 그녀를 사랑하는 게 아닐 거라는 믿음은 생에 그 어떤 때보다 내게 확신을 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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