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고 괜찮지 않고 그 기준이 남과 조금 다르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과거가 알고 싶고 모두 수용하고 싶고 전부 안아주고 싶다. 그 사랑이 현재 진행형이 아니라면 그가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만 있다면 그가 어떤 사랑의 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흔쾌히 모두 괜찮다. 지난 사랑으로 한 번도 상처 받은 적 없었다.
그는 지난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 아쉽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가 진한 연애를 해본 적 없기에 나와의 연애와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 정확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첫사랑이다. 그가 나를 만나기 전 열 명쯤 만나봤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럼 그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랑에 좀 더 안심할 수 있을 텐데.
처음 하는 사랑인데도 내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 그가 조금 이상했다. 그 모든 게 지금의 나를 만들어서 그리고 지금은 자신과 사랑을 하니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이상해서 좋았다. 지레짐작 '아마 날 만날 한국 남자는 아무도 없을 거야.'라던 편견이 우스워질 만큼 쉽게 무너졌다. 특별히 과거를 숨기진 않았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특히 좋았던 기억은 말한 적 없다. 안 좋았던 점 위주로 아쉬웠던 점 위주로 지난 사랑에 대해 단편적으로 간략히 가끔 적당한 타이밍에 자연스럽게 말했을 뿐이다.
우리는 평소 가보자고 노래를 부르던 동네 카페에 드디어 갔다. 비엔나커피를 두 잔 시키고 마지막으로 남은 자리에 앉았다. 햇볕이 창가로 비췄고 행복한 기운이 넘실거렸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지니가 딱 나타나잖아. 세 가지 소원으로 무얼 빌 거야?"
역시 내가 지니도 아닌데 백만 년 신중히 고민하던 그는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내가 화들짝 놀라서 '정말?'이라고 묻자 그는 '너랑 여행을 갈 거야'라고 답했다. 문득 그가 한 번도 혼자 여행을 해본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올해 안에 한 번은 혼자 여행을 가라고 마구 추천했다. 그러다 문득 나는 그가 나의 쿠바 여행기를 읽으면 좋겠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다 보여줘도 최후까지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남자에게 자진해서 내 이야기를 모조리 정성 들여 읽어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그걸 보면 그가 나를 좀 더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을 거쳐 너에게 왔는지 압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그걸 좋아하지 않을 테지만 그 라면 괜찮을 거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신나게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다른 일을 하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12시가 지나고 1시가 지나고 새벽 2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잠이 올 생각을 안 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이 가득했다. 나는 불안하고 걱정이 가득했다. '이건 실수야. 실수한 거라고!' 머릿속의 종이 댕댕댕 울렸다. 옆을 보니 머리만 대면 잠이 들었어야 할 그도 나를 응시한다.
"나 너무 걱정돼. 그래서 잠이 안 와. 아까 책을 보여주기로 한 거 말이야."
"뭐? 걱정할 필요 없어."
"아냐. 내가 잘 못 생각한 것 같아. 그러니깐 나는 그거 때문에 우리 사이가 망가지거나 네가 나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을 갖게 되거나 그런 건 다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그런데 나는 네가 상처를 받을까 너무 두려워."
우리는 한 번도 상처 준 적 없다. 어쩌면 우리가 아직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결혼하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직 서로에게 아픈 기억이 없다.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상처를 줄까 몹시 두려웠다. 상처는 한 번 받으면 되돌릴 수 없는데 굳이 내가 괜히 상처를 주게 되는 걸까 봐 고통스러웠다. 괜히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나를 꽈악 안았다.
"나는 네 생각보다 강해. 그렇게 쉽게 상처 받지 않아. 나는 네 과거는 신경 쓰지 않아.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기에 뭐든 괜찮아."
"책을 읽다가 힘들면 던져버려야 돼. 상처 받으면 안 돼!"
"알겠어. 못 읽겠으면 던져버릴 게."
"정말 나는 괜찮은데. 나는 반대 상황이라도 괜찮은 데. 내가 그래서 괜찮은 게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없다 해도 괜찮은데. 너도 괜찮을까?"
"응. 괜찮아."
마음이 뜨거워졌고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나쁜 꿈 없이 잠이 들었다. 역시 나는 나쁘다. 이 모든 게 내 마음 편하고자 하는 욕심일지도 모른다. 예전 같으면 불안한 마음에 방어적인 시험이었을지도 모른다.
'나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너 나 안 떠날 거니?'
하지만 이번엔 그런 게 아니다. 가장 그 이야기를 읽어줬으면 하는 사람은 사실 그였다. 그가 보게 될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이야기를 썼고 책으로 내고자 한다. 내가 정말 그 책을 그에게 건네게 될지 아니면 철회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와의 관계를 끝장내려고 하는 건 아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있다. 나의 믿음과 우려 가운데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매일매일 마음이 뒤바뀐다.
역시나.. 지난 사랑 이야기를 현재 사람에게 건네는 건 실례인가요?
P.S. 부인이 될 사람이 또라이라 미안하지만 네가 택한 여자가 골 때리는 또라이란다.
응모분야: 수필
응모자: @fgomul
응모글: #1 지난 사랑 이야기를 쓰는 건 실례인가요?
#2 지난 사랑 이야기를 건네는 건 실례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