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에 대해 완전히 잊으면 진짜 공덕이고, 그래서 복을 받는다”
라고 분명히 해놓고 부처님은 이제
"공덕을 받지 않는다"
고 ‘도리도리’다. 이건 마치 “내가 언제 몇시 몇분에 그랬지?” 하는 격이다. 매번 딴소리다. 이런 대목에서 독자가 눈치채야 하는부분은 당신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계속 말을 번복하는 부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충 끄덕이며 “그렇군”이란 자세가 아니라 약간은 눈쌀을 찌푸리며 의심스런 자세로 읽어나가야 당하지 않는다.
若菩薩 以滿恒河沙等 世界 七寶 布施
만약 보살이 갠지스강의 모래만큼이나 많은 세상에 그득한 일곱가지 보석으 로 보시하였다면?
갠지스는 인도 말로는 강가Gaṅga인데 서구식 표기로 갠지스Ganges가 익숙해졌다. 인도식 강가를 한자로 음차하면 항하恒河이다. 여기는 강이지만 모래사장이 있는데, 경전에 많이 나오는 구절이라서 대단히 친근감이 든다. 스님들은 인도순례를 가면 필름통에 모래를 담아와서 작은 청심환통에 나눠서 지인들에게 선물하고는 했는데, 그걸 받아 본 적이 있다. 잿빛에 밀가루만큼이나고운입자. 그러니 항하 모래수라면, 우리가 상상하는 모래알보다 그 수가 분명 더 많을 것이다.
“이만큼 베풀었으니 그래도 최소한 이만 큼의 공덕이 있겠지”
란 상상은 ⟪금강경⟫에서는 취급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주고 욕먹는’
상황이다. 이렇게 엄청난 가정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 더 쎈 ‘진짜가 나타났다.’
若復有人 知一切法無我 得成於 忍 此菩薩 勝前菩薩 所得功德
"'모든 것에는 영원히 변치않는 어떤 실체가 없다는 진리’를 알게되고 그 경지에 간 사람이 있다면, 이 보살은 항하 모래수만큼의 세계에 그득한 일곱가지 보석으로 보시한 앞 사람의 공덕보다 더 훌륭합니다."
불교는 모든 것에 어떤 실체도 없다는 것을 체득하여 그 존재나 소유로부터 오는 괴로움을 내려놓는 것을 진리의 척도로 삼는다. 그것이 말하자면
‘영원히 항상 불변하는 것이 없음/시간적인 - 무상'
'현상의 모습 배후에 어떤 보이지 않는 실체가 없음/공간적인 물질, 생각 - 무아'
의 진리라고 하는데 이를 완전히 체득한 경지를 '무생법인'이라 고 한다. 여기서 ‘忍’은 ‘깨달은 이의 경지’를 의미한다.
비록 경전에 나오는, 책에 나오는 좋은 귀절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일상에서 어느 순간 치닫는 욕심을 스스로 발견하고 어떤 부분을 딱! 내려놓았을 때 그 홀가분함과 자유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을것이다.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때 마음이 주는 그 역설적인 충만함이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다. 인생에서 그만큼의 체험보다 더 큰공덕이 사실 어디에 있겠는가.
만일 내려놓음으로서 충만해지는 그 순간을 느껴 본적이 없다면, 아직 제대로 된 복덕을 받아보지 못한 것이 맞다. 대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면서 성취감에서 기쁨을 누리지만 때로는 있는 것들 중에서 불필요한 ‘마음씀이’를 내다 버리면서 얻는 기쁨도 있다.
하긴 뼈와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도 다이어트를 해야하고 시켜야 하는 현대의 문화를 보면, 이미 내다버리면서 얻는 기쁨에 대해 현대인들은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대개는 '살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이 없는 상태를 얻기 위한 것'임을 생각해보면, 그건 관계없는 것인지도.
以諸菩薩 不受福德故
이 모든 보살들은 복을 받지 않기 때문이오.
世尊 云 何菩薩 不受福德
세존이여, 왜 보살은 복을 받지 않는 것입니까
須菩提 菩薩 所作福德 不應貪著 是故 說 不受福德
수보리여, 보살은 복을 지으면서 [그 복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복을 받지 않는다고 한 것이오.
이제 '받는다/안 받는다'의 문제가 아니라 ‘공덕’이란 생각 자체를 내려놓아야 할 시점이다. 보살은 ‘공덕 따위’ 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그것이 보살의 복짓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렇게 통큰 스타일의 보살들을 마하살 mahasatta, 한문으로는 대사(大士, 위대한 사람)라고 번역한다.
무엇인가 선행을 하거나 무엇인가를 베풀 때 우리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는다. 그것까지 갖지말라는 것은 좀 혹독해 보이지만, 누군가를 향한 선행의 리액션이 없을 때 우리가 그것에 대해 '서운'해 하고 '은혜나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 대상을 비난하는데까지 이르게되는것을 보면, 선행이나 베풂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