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공개 일기 chapter 1

admljy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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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사랑스럽다." "네가 보고 싶어 죽겠다." "네가 그 사람과 같이 있어서 질투가 났다." 이런 말은 하기 쉽지만,
"난 그저 남성성에 대한 내 컴플렉스를 해소하고 싶어서 널 옆에 둔거야, 현실이 보잘 것 없어서 너 정도로 타협했어."
같은 말은 하기 어렵다.

어제 아침 꿈에서 깬 뒤 몇시간 동안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그 꿈의 메세지가 명쾌하다는 것과 별개로, 무슨 꿈인지는 부끄러워 차마 말할 수는 없다. 어제 아침부터 그 꿈을 정리하고 또 나를 추스리고자 노력했지만, 그것을 효과적인 글로 표현하는 데에는 끝내 실패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삶에는 주옥같은 보물이 있기 마련이다. 넓은 백사장에는 별다른 수고 없이도 주울 수 있는 반짝이는 돌들이 널려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얼마나 더 많은 것을 가져갔는지에 관심을 두기 마련이다. 쿨한 척 한다만 거기서 정말 초월한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종종 자신이 느끼는 감정 자체를 부정확하게 파악하는 사람도 보았다. 열등감이나 질투, 과시 또는 무시에 대한 분노 등등 자기 마음 속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기 싫은 감정들이 있다. 사람들은 이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대신,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주기적으로 비참할만큼 유치해지고 여자들은 목적 없는 뒷담화에 열중한다.

현 세상에서 웃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긍정적으로 살으라는 뻔한 교훈을 담은 책은 어느 때나 잘 팔리고, 사람들은 인터넷에 자신의 건강하고 즐거운 생활을 알릴 사진을 포스팅 하는 데 여념이 없다.

나는 결코 행복하지 않다. 어차피 남의 마음 속에 들어가볼 수 없는 이상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다만 합리적으로 추정해볼 수는 있겠지. 다만 또 불행한 것만도 아니다.

자기 삶을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아왔다. 정말 행복한 것일지, 아니면 괴테의 말처럼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세뇌시키는 것일지. 한때는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나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아닌 사람이 되는게 인생의 목표였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은 뒤 다른 사람의 세계관이 나보다 훨씬 취약할 가능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가진 그 유치함이란. 자기 감정 처리를 제대로 하는 인간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나는 당신들이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감당할 수 없는 결과에 당황하며 보여주는 말기암 환자 같은 모습이란. 당신들은 그저 둔한 놈에 불과했던건가.

내가 만난 여자들은 당당한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들 믿었다만 그녀들은 약하기 그지 없는 존재들이었다. 먼저 전화를 끊는 사소한 행동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의 "난 외롭지 않아. 난 강해. 난 행복해." 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여자들의 행복 지수가 더 높게 나오는 건 그녀들이 자기 세뇌의 일부를 충실히 설문지에 옮겨 놨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자들은 쉽게 운다. 여자가 약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보다 더 유능한 여자들은 당장 이 컴퓨터실 안에도 널려있다. 다만 그와 별도로 그녀들의 감성이 남자의 그것보다 더 풍부하다는 것은 오랜 연구 결과로 검증된 바 있다. 그리고 의사들은 말한다. 우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감정을 억압하면 병이 된다고. 나 역시 그렇게 믿으며 살아왔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것은 '남성성'보다는 '여성성'이다. 눈물 많고 상처 많은 그 꼴 사나운 자기 연민이란. 나는 늘 약했다.

그런 삶을 돌아보며 다시 묻는다. 과연 나는 건강했던가? 잘 웃고 잘 우는, "당신은 행복합니까?"라고 묻는 질문지에 Yes라고 마킹하는 보통 여자들은 행복하던가? 내가 내린 결론은 "그렇지 않다."이다.

이 세계는 점차 감정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광고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호소하고, 복잡한 사변과 설득보다는 옷차림이나 유머 감각이 더 중요한 가점 요소로 작용한다. 대부분 드라마나 영화는 감정을 억제하지 말고 마음껏 분출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나 상기의 사례를 바탕으로 한 내 결론은 이와 다르다.

내 삶의 목표란 철저하게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수정할 생각도 없다. 그것은 내 삶 전체를 관통하는 한 줄기 생명선 같은 것이기에 억누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나무에서 자라나는 잔 가지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스멀거리는 잔 감정들을 방치해두어도 바라는 큰 열매를 가져갈 수 있을까.

나는 비극과 예술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를 일정 부분 지지한다. 플라톤은 감정은 열등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을 자라게 허용한다는 것은 영혼의 열등한 부분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일단 감정을 분출하게 되면, 자신의 덕에 어울리지 않는 열등한 습관을 가지기 시작한다. 플라톤의 격언은 작금의 내 현실에서 내가 금과옥조로 삼아야 하는 것 아닌가. 작은 것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이런 내 태도는 과연 건강한 것일까.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영혼이 배에 있다고 믿었다. 그 말은 일정 부분 맞는 말이다. 위장에는 몸 어느 곳보다 많은 신경이 몰려있다. 위장이 약한 사람 중 건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여기서 알아두어야할 것은 '신경 조직'이란 쓰면 쓸수록 발달한다는 사실이다. 정신과에서 병행하는 전기치료는 별 다른 게 아니라 바로 내분비계를 무디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적당히 눌러두어야 하는 것인데 너무 자주 분출했던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열등한 습관을 이기지 못하면 인생에서 어떤 열매도 얻을 수 없다. 내가 추구하는 바를 얻기 위해선 나는 도구화된 이성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실제로 그 결론대로 행동한 적은 드물다.

분노와 적대감이라라니. 그것도 어리석은 감정 아니냐. 그게 추진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던가.

어제 아침 꾼 꿈은 망측하기 그지 없었다. 아니 어쩌면 꽤 달콤한 꿈이었는지도 모르지. 내가 갈망하던 것은 모두 다 들어있었으니까. 그러나 실현 가능성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거세한 환관이 득남을 하는 꿈을 꾼 뒤 일어나 자신의 흉측한 아랫도리를 살펴본 기분이라고 할까. 한순간 즐거움은 현실의 괴리가 준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서론이 길다. 이제 완전히 이곳을 떠나기 전 몇 마디 말만 더 하고 싶다. 누가 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이 블로그는 사회성이 배제된 공간이다. 가사 내가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 이제는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니까.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내 블로그는 내 열등한 부분의 확장에 불과하다. 더 이상 이곳이 존재할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카타르시스가 주는 효용이 어느 정도일지. 내가 써지르는 과격한 논조의 욕설이 내 정신 상태에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1년간 해봤으니 이제 그만둘 때도 된 것 아닌가 싶다.

헤겔은 철학이 발달하면 예술의 존재 가치는 사라진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발전적 신열을 거쳤다고 스스로 믿고 있으며 지금 단계에서 이 공간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선언하고 싶다. 차후에는 내면의 강인함에 의존해 더 이상 내게 유약한 부분을 살려두지 않을 셈이다.

모든 문제는 답은 결국 마음 안에 있다. 막연히 누군가 내 글을 읽고 나를 이해해줄 것이라는 감정은 어리광에 불과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을........ 습관의 문제였을 뿐이지. 내가 그걸 버리지 못하자 내 꿈이 그것을 알려주었던게다.

  • 2009년 4월 29일, 열등한 스물 네 살이 쓰다
*마지막 공개 일기 chapter 1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