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사회적 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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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이고 우울하며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음악을 들었다. 정확히는 ‘주는’이 아닌 ‘주려는’이다. 이 둘의 차이는 크다. ‘주려는’은 인위적이고 의도적으로 감성을 ‘조작(작곡)’하는 것이다. 몇 번 들으면 그 의도가 느껴지고 이내 식상해진다.

주로 경험과 연륜이 좀 있는 뮤지션이 이런 음악을 만든다. 순수한 음악적 표현 외에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망이 자신의 음악에 담기기 시작한다. 물론 뮤지션 본인은 그 욕망을 부정한다.

이 음악 작곡자의 단점은 곡 구성과 드럼 비트가 단조롭다는 것인데, 미니멀이나 심플함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단조롭게(지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서정적인 멜로디로 그 단점을 보완하는 편이다.

멜로디는 작곡자의 감성에서 나오고, 곡 구성과 드럼 비트는 감각에서 주로 나온다. 그래서인지 그 음악은 감성적이지만 감각적이진 못하다. 그래도 감성적인 ‘좋은’ 멜로디를 쓰는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없다.

예술작업에서 감각이나 감성 같은 좀 ‘기술적’인 느낌 외에, 창작자의 인품이 느껴지는(표현되는) 경우가 꽤 있다. (어느 소설에서는 ‘영혼’이라고 묘사하기도)

그 ‘서정적인’ 음악에는 작곡자의 강박이 담겨있다. ‘미니멀’한 것이 남들에게 더 멋지게 ‘보일’ 것이라는 강박. 자신이 훌륭한 음악을 만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강박 때문에, 자신이 뛰어난 예술가라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욕심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던 그 인품이 그대로 그 음악에 담겨있다.

주변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피해를 입힌다는 건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예술의 가장 기본은 공감이다. 머리가 좋은 작가는 공감을 연기(연출)할 수 있다. 마치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이 사회 안에 녹아들기 위해 공감능력을 연기하는 것처럼.

평판이 나쁜 회사의 제품이 아무리 훌륭하고 저렴해도 그 제품을 구입하지 않는 것처럼, 그 예술작품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 예술작품을 만든 예술가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줬다면, 그 예술작품을 거부할 자유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히 이런 ‘예술작품의 사회적 소비’를 할 수 있다.

그 예술작품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작가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인격자라면 그 작품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인품과 작업 모두 훌륭한 경우도 많은데, 굳이 그런 작업을 감상(소비)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음악은 그렇게 훌륭하지는 않다. 물론 그 작곡자를 잘 모르는 몇 사람들은 그 음악에 좋은 평을 남긴다. 하지만 그 평론 역시 그 음악과 비슷하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 음악이 좋아서 쓰는 글이 아니라 그 음악이 ‘좋아야만 한다’고 쓰는, 인위적이고 의도적인 글이 나오게 된다. 그런 음악과 어울리는 그런 글을 보면, 그래도 이 세상이 나름대로 ‘공평’하게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