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있는 비평, '권위적'인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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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1945년 <현대 Les Temps modernes>지誌 창간사에서 문학의 정치참여 이념을 주장했다. 당연하게도 이 글은 ‘구식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며 비판받았다.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런 비판을 다시 비판했다.

사르트르는 글을 쓴다는 ‘자유’는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떼어놓을 수 없으며, 당신이 어떤 견해를 말하든 간에 글쓰기는 자유를 희구하는 한 방식이므로 글쓰기를 시작한 이상 당신은 좋건 싫건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사회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행동들, 그리고 정치적 견해를 전혀 표명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예술을 위한 순수한 예술’ 역시 모두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대중적인 재미가 없을지는 몰라도, 사르트르는 ‘말’, ‘구토’ 등을 쓴 소설가다. 그의 문학 ‘비평’에는 그 소설들을 창작하기 위해 들인 많은 노력과 경험이 담겨있다. 때문에 그의 비평과 의견이 다를 수는 있어도, 비평가의 '자격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비평가나 평론가가 되려면 적어도 그 분야에서 직접 ‘손으로’ 작업한 경험이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직접 연주를 하고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 쓴 평론이 더 '쉽고' 명확하며 설득력이 있는 경우가 많다.

평론뿐만 아니라 실제 작업도 비슷하다. 예전에 어떤 사진전시회를 보러 갔다. 작가별로 ‘설득력’에서 차이가 보였다. ‘기술’은 비슷했다.

이력을 살펴보니 좋았던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사진을 전공했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작가는 대학원 때부터 사진을 전공했다. 물론 전공자가 반드시 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때 본 전시에서는 ‘우연히도’ 그 차이가 뚜렷했다. 당연히 ‘손’의 차이, 얼마나 직접 경험을 더 많이 했는가에 따라서 차이가 난 것 같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손’ 경험이 없는 ‘애호가’의 예술 비평(평론)은 권위가 없는 개인의 ‘감상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런 ‘감상문’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권위가 없는 개인 감상문’을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 실은 이런 글에서 더 ‘권위’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예술 작업은 사회적(정치적)이고 집단적인 동시에 개인적이다. 개인 한 명만 만족하는 예술 작업도 나름 필요하며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손’ 경험이 없는 ‘애호가’가 ‘권위적’인 비평가가 되는 것이다. '권위'와 '권위적'은 반대에 가까울 정도로 그 뜻이 다르다. ‘권위’는 스스로 생기는 것이고, ‘권위적’은 외부에서 '억지로' 부여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권위적’이란 지위나 권력을 내세워 상대를 억압한다는 일반적인 뜻이 아니라, ‘권위’가 없는데도, 즉 비평의 설득력과 개연성이 떨어지는 개인 애호가의 수준임에도 억지로 권위가 부여된 것을 말한다.

‘애호가’가 아닌 ‘손’ 경험이 있는 ‘작업가’가 비평이나 평론 분야에서 더 자주 보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