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잇 연재소설] '길삼봉전'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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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당장에 집안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김씨 부인이 오고 나서 순종은 말과 가마를 사고 닭 5마리를 사왔다. 그래 내가 할 일만 늘어난 거다.

물독도 세배로 늘었다. 장작도 안 채 것까지 세 배를 더 해야 한다. 거기다 김씨 부인이 베틀을 사왔다. 막금이 순종의 방직비로 일하면서 베틀을 짜야 되는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밤늦게 토굴에 돌아와 몸을 눕힐 때까지 하루가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처음엔 좀 더 빠르게 할 일을 하면 짬이 나겠지 했지만 아니었다.

순종이 사온 말은 정말 까칠한 놈이었다. 마의 하나가 와서 돌봐주긴 했지만 똥 치우고 여물 먹이고 손이 여간 많이 가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기분 나쁜 건 그 말을 타고 순종이 인근에 나갈 땐 내가 말 앞에 서서 같이 가야 한다는 거다.

덕분에 좋아진 것도 있다. 김씨 부인 집안이 제법 큰 기침 좀 하는 집안이어선지 동네 양반 댁 마님들이 자주 찾아왔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아이템을 찾았다. 저들이야 말로 실질적으로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인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이 데려온 종들과 인맥을 맺으려고 노력했다.

처음에 그들은 내가 말을 듣지도 하지도 못한 다는 걸 알고 얕잡아 보았으나 내가 입술을 읽고 웃어주자 이내 마음을 조금씩 열었다.

마을의 종들을 거의 알게 되었다.

그 중에 최고 힘 좀 쓰고 머리 좀 큰 놈이 바로 만수였다. 마을에서 제일 부자에 서인들과 줄이 닿아 있는 어느 양반 집 수노였다.

그는 외거 노비들의 신공도 받으러 다니고 멀리 떨어진 도망친 노비도 잡으러 다니는 등 길택이보다 더 자유로운 종이었다.

만수를 엮어야 한다. 나는 놈과 친해지기 위해 무척 노력했지만 시간이 부족하고 틈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만수가 고민을 하고 있길래 내 입술 놀림으로 조금은 대화가 되는 종을 시켜 그의 고민을 들어보았다.

자기 주인에게 제법 신뢰를 얻고 있어서 그는 조금 이리저리 횡령을 해서 자기 재산도 가지고 있었다. 외거노비에게 맡긴 소도 있고 논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종이 필요했다. 공사다망한 자기가 다 관리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종을 살 수도 없었다. 외거노비들이 주인 대신 자신들을 관리하는 그의 부탁을 다 들어주었지만 미덥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만수는 그래도 문자를 조금은 알지만 다른 종들은 문자를 모르니 소통이 어려웠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나는 만수에게 알려주었다. 어려운 문자대신 기호를 만들어서 가르쳐 소통을 하자고 했다.

만수가 처음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닭이며 소를 뜻하는 그림들을 그려 보여주자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럼 모두가 다 약속처럼 알 수 있는 그림책으로 된 암호 책을 만들라고 시켰다.

대신 일단 고민해보겠다고 대답하고 대신 주인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종들만의 암호여야 한다고 뜸을 들였다.

만수의 눈이 빛났다.

고민되겠지. 나중에 그런 걸 만들어서 주인들에게 저항했다는 게 들통 나면 경을 칠 수 있다. 더구나 놈은 기득권을 가진 종이다.

일단 만수가 대답을 딱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녀석이 내가 내민 미끼를 물까?

나는 놈이 결국 나를 다시 찾아올 거라고 확신했다.

도움이 필요했다. 이 작업을 나 혼자 할 순 없는 것이다. 막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라면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도 나름대로는 정말 많이 바빴다. 저 백수 순종의 온갖 심부름에, 순종과 김씨부인의 옷과 침구류 등의 빨래며 수선 바느질에, 우리 종놈들의 옷까지 맡아서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기억나는가? 나는 김씨 부인이 오기 전까진 정말 거지 중에 상거지 차림으로 살았다. 김씨 부인이 온 뒤로 바뀐 것들 중에 내 옷차림도 속해있다.

그렇게 바쁜 만금에게 어떻게 하면 도와달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그녀의 일을 도우면 되겠지만 그녀는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진짜 틈이 없는 그녀였다.

그런 저런 고민을 하며 안채 장작을 채우고 있는데 춘비가 순종의 아들을 데리고 밖 마루에 나와 젖을 물렸다. 젖이 든 가슴이 얼핏 보였다.

저게 지금 나를 유혹하는 것인가? 내 아무리 굶었어도 아이의 입에 물리는 젖을 보고 무슨 감흥이 있겠나.

순간, 춘비가 답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춘비가 막금을 도우면 막금과 이 암호 책을 만들 수 있다. 나는 장작을 다 정리하고 일부러 그녀의 가슴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그러자 춘비가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뭘 보는 겨? 내 이른다?’

나는 일부러 춘비에게 가까이 다가가 입술에 손가락을 대는 시늉을 한 다음 입술을 움직였다.

‘차암, 예쁜 젖을 물고 있는 우리 도련님이 부럽구만. 뭐 이른다면 할 수 없지 그럼 기왕 맞을 거 좀 더 확실하게 보고 맞고 싶네.’

내 입술 놀림을 따라 하며 뜻을 새겨본 춘비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뒤 돌아서서 안채를 나왔다. 뒤로 춘비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그날 밤, 춘비가 내 토굴에 찾아왔다. 손에 쌀떡이 들려 있었다.

‘오늘 마님이 가져다 준 떡이고만.’

나는 떡을 물리면서 입술로 말했다.

‘그 떡 말고 다른 떡은 없을까?’

‘쿵떡, 쿵떡’

춘비가 자지러지게 웃더니 말했다.

‘감당할 자신은 있는 겨?’

‘당장은 아니고. 차근 차근.’

‘워째 당장은 안 되는 겨? 종년 젖은 주인 젖이요, 종년 아랫도리도 주인 것이지만, 종년 마음은 주인 것이 아니여. 내 주기 나름이지. 마음 가면 몸 가는 게 계집인 거구. 설마 막삼이가 무서워서 그런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튕겨줘야 하는 거다. 슬쩍 줘 볼까? 하고 찔러보는데 낼름 받아먹겠다고 덤비면 여자는 그만큼 나를 싸게 본다.

쉽게 현대 걸로 비유하자면 나는 100원 짜리인데 그냥 덤비면 50원 깎여 50원짜리가 되는 거다. 잘 튕겨서 120원짜리로 보여야 20원 어치 더 받아먹을 수 있다.

마침 순종이 내 토굴로 오고 있었다.

‘너 너무 안 맞았지 요즘? 어디 한 사나흘 맞아서 또 누워 볼 테냐? 왜 마구가 저리 지저분하단 말이냐. 게으름은 주인에 대한 가장 큰 불충이니라. 불충은 매로 다스리는 게 주인의 법도이고.’

아 저걸 확 마구에 처박아버려야 하는데 언제 그날이 올까? 다행히 김씨부인 눈치를 보느라 저 놈이 요즘 때리진 않았지만 툭하면 저리 심통을 부렸다.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바로 달려가 마구를 치웠다. 순종이 닮은 이놈의 말, 참 많이도 쌌다. 그리고 나오는데 순종이 또 심통을 부렸다.

‘내 이 종놈이 자신의 본분을 자꾸 잊으니 주인으로서 엄히 다스려야 되겠구나. 그리 마구만 치우면 그만이란 말이냐? 집 마당도 좀 쓸고 독들도 좀 닦고 부지런히 움직여서 주인을 기쁘게 해줘야지.’

저 놈이 패죽이고 싶게 얄미운 쥔 질을 그만두게 할 수 있는 방도가 없을까? 아니다 가뜩이나 머리 속이 복잡한데 저 놈까지 문제를 일으키면 대책이 안 선다. 일단 달래야 한다.

‘소인 궁금한 게 있습니다요.’

‘그래 모르면 묻는 게 예니라. 묻거라.’

‘주인 나으리는 학문이 깊으시다 들었는데 어찌하여 과거를 보시지 않으십니까요? 보시기만 하면 떡하니 바로 급제를 하시고 나랏님께서 친히 나와 모셔갈 거라고 소문이 자자한데 말입니다요.’

‘누가 그리 말하더냐?’

‘종놈들 사이에선 이미 새로울 것도 없는 소문입니다요. 종놈들이란 게 본시 주인님들 말을 들어서 아는 거지 그 말곤 어디서 배울 때도 없으니 그 주인들도 모두 그리 말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요.’

기분 좋으라고 했다. 그런데 순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저놈이면 이 정도에서 허허허 웃고 돌아서야 맞는 레벨의 자존감인데, 놈의 얼굴이 붉어졌다.

분명히 보였다. 지금 순종, 저 놈은 고민하고 있는 거다. 그 고민은 바로 마누라에게 욕을 먹더라도 날 패느냐? 아니면 참느냐다. 내가 실수한 거다.

아 나도 여기 와서 이래저래 어리버리 해지고 있는 거다. 심리전도 기술이다. 연마를 하고 자주 써먹지 않으면 잊는다.

다행히 순종이 놈이 한 번 참고 마누라에게 싫은 소리 안 듣는 걸로 결정을 내렸는지 그냥 돌아섰다.

나는 토굴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내일은 춘비를 한 단계 더 끄집어내서 막금을 돕게 하고 막금에게 암호 책 프로젝트를 말해서 도움을 청해야 되겠다.

그리 생각하다 눈을 감고 잠이 들었는데, 몸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떤 손이 숙 하고 들어와 내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눈이 부릅떠졌다.

그래 춘비였다. 나는 얼른 춘비를 밀쳐냈다. 그러자 춘비는 더욱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내 얼굴에 가까이 대며 움직였다.

‘그리 튕기니까 더 땡긴다. 막삼이 놈 나갔으니까 걱정 말고 얼른 움직여보자고.’

내가 고개를 심하게 젓자 춘비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다시 입술을 놀렸다.

‘사내구실 오늘 오지게 한 번 해보라고. 아 어서 움직이자니까.’

그때였다. 막삼이 들이닥쳤다. 다짜고짜 주먹과 발길질이 날려왔다. 하지만 느렸다. 순종의 무예와는 완전 격이 달랐다. 동네 꼬마들 싸움처럼 마구잡이였다. 그러나 내 눈에도 온통 틈이였다.

나는 살짝 피하고 막삼을 걷어차고서는 얼른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뒤 따라 나온 막삼이 빗자루로 내 뒤통수를 때렸다. 또 때리려고 하는 막삼의 손에서 빗자루를 빼앗아 나는 막삼을 패기 시작했다.

한바탕 소란에 모두가 달려왔다.

목줄이 터져라 막삼이 소릴 질렀다.

‘이 잡 놈이 내 계집을 건드리네. 아 이 잡놈이 내 계집을 훔쳐가네. 내 오늘 너 죽고 나 죽는다. 아이고. 이 천하의 잡놈아. 네 오늘 널 죽이고야 말테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온 순종이 날 또 걷어차려고 하는데 김씨 부인이 말렸다.

‘주인이란 자가 잡것처럼 뭐만 하면 그냥 패기만 하니 종놈들도 다 패는 것밖엔 모르는 거다.’

순종이 자....잡 것? 하며 대들어 보려다가 무서운 김씨 부인의 눈빛에 움찔해서 물러서자 김씨 부인이 막삼에게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주인은 나다. 네 어찌 잡것 같은 주인 종놈과 잡 것 같이 변해가려 하느냐. 어서 뚝 그치고 엎드려 연유를 고하지 못할까?’

막삼이 바로 엎드려서 말했다.

‘저 놈이 제 계집 춘비를 덮치고 있었습니다요.’

김씨부인의 눈이 빛났다. 나를 휙 쏘아봤다. 저런 여자는 남자가 여자를 덮치거나 패고 못 살게 구는 걸 정말 싫어한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에 도착한 막금이 실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막금의 눈을 보고 나는 얼른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입술로 말했다.

‘제게 마님께서 주신 쌀떡을 내어준 춘비가 너무 고와서 순간 욕을 보였습니다요. 하지만 정녕 끝을 보려 한 것은 아닙니다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뒤에 나온 춘비가 얼어붙더니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씨 부인도 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막금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김씨 부인이 춘비의 뺨을 치고는 말했다.

‘내 그리 행실을 다지라 어릴 적부터 말했거늘. 저 둔한 놈이 욕을 보이게 틈을 보였단 말이더냐?’

춘비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울먹이자 막삼이 나섰다.

‘저 놈을 혼내셔야 합니다요. 계집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요? 마님. 제게 저 놈을 혼내게 해주셔야 합니다요.’

상황을 모두 읽은 순종이 큼큼 거리다가 그 틈을 노려 나서서 막삼에게 말했다.

‘물러나라. 내 이 집의 가장으로서 모든 걸 정리 할 터이니 너는 더 소란 피우지 말고 그만 들어가거라. 그리고 오늘 밤은 이 집 사람 모두,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어야 할 게야. 이는 이집의 가장으로서 하는 말이다.’

그말에 어쩔 수 없이 분한 표정을 누르며 막삼이 춘비의 손을 잡고선 넙죽 인사하고 제 토굴로 들어가자 김씨부인이 코웃음을 치더니 혀를 차며 돌아섰다.

‘가장 쥐 죽은 듯 있어야 할 자가 누군데........쯧쯧쯧’

순종이 ‘저.....저.....’하다가 가던 김씨 부인이 휙 돌아보자 또 말을 삼켜 숨기곤 그걸 보며 웃는 나를 쏘아보고 돌아섰다.

막금이도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곤 떠났다.

[스팀잇 연재소설] '길삼봉전' 17화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