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늑대'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이야기라는 식으로 소개되어져 있는 책인데, 이 책의 저자인 마크 롤랜즈가 자신의 소울메이트인 늑대와 함께 쓴 동거일기로, 11년간 함께하면서 겪은 모험과 우정, 그리고 우리가 인정하기 싫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유머와 감동으로 풀어낸 책이다.
철학교수인 저자는 어느 날 구멍이 난 삶의 부분을 채우기 위해 개로 둔갑한 늑대를 입양한다. 4일 만에 목줄 없이 나란히 걷기를 터득하면서 강의실에서, 파티장에서 어디를 가나 인기를 독차지한다. 그리고 개의 가면을 쓰고 인간 세계에 어울려 살면서 거꾸로 인간의 가면을 되비추기 시작한다.
인간은 수천년 동안 지구위의 다른 생명체들보다 아주 특별하고 대단한 존재라고 확신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은 터무니없는 환상이었음이 드러났고 시대가 갈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길을 잃고 번민하는 형국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진실이 드러나고 망상이 깨졌음에도 왜 세상은 오히려 더 어지럽고 황량해지기만 하는 것인가? 이 원인을 따지고 보면, 진실을 직시할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던가?
진리를 숨김없이 정확하게 직시한다는 것은 그 순간은 아주 비통할 수가 있지만 이보다 더 통쾌한 것 또한 있을 수 없다.
* 늑대는 결코 사악하지 않다 -
성경과 신화류의 이야기들, 그리고 전설속에는 공통적으로 늑대라는 존재를 악마의 상징이나 대리인으로 묘사를 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늑대는 악한 존재라는 나쁜 존재로서 우리의 머리속에 학습이 되어져 왔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여 보면, 철학적인 답변으로서 응답을 할 것이다.
만약 철학자인 니체나 루소였다면, 가장 사악한 것이 인간본성의 박탈 내지는 상실이라고 했을 것이고, 공자 역시도 비슷한 답을 했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주어진 본성 그대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늑대는 천성대로 사는가?
우리는 대부분 철학의 논리학을 익히지 못해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질 기회가 적었지만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인 개의 본성이 처음에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고 있는가?
야생에서 본성대로 잘 살던 늑대를 잡아다 거세,순치해서 인간의 손으로 길들이고 야생의 본성을 말살해 놓은 것이 바로 개라는 동물이다. 철학자의 말대로라면, 개는 늑대의 본성을 잃어보리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악한 존재여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개를 사악하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사실을 알게 되면 본성을 잃어버린 불쌍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야생의 늑대는 여전히 자기 본성을 잃지 않고 용감하고 기품있게 살아간다. 문제가 있다면 오히려 인간이다.
과연 인간이 자연의 늑대처럼 사는지,아니면 순치된 개처럼 천성을 망실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보라. 인간존엄에 관한 것이기에 단언할 일은 아니지만 철학에서는 한결같이 인간본성을 회복하자고 역설해왔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 다시 회복해야할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철학자들이 오랜 세월동안 고민한 결과가 있었고, 이것이 정리되고 압축되어서 헌법의 체계에 새겨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모든 헌법의 기본정신인 "자유와 평등",즉 주체성과 공동성이다. 헌법에서는 가장 우선적인 개념으로서, 평등과 자유를 천부적 인권으로 인정하고 이를 철저히 보장하고 있지만, 이 기본이념과 모순되는 수많은 하위 악법들이 있어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하고 가장 부자유하고 그래서 가장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침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게 되어서 새로운 희망은 갖게 되었지만 우리가 이렇게 근본적,철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 때에 지속적으로 세상을 바로잡아 나아가지 않으면 새로운 희망의 지속력은 약해져 갈 것이다. 인간의 노예가 돼버린 개는 조상이 누구인지도 몰라 구제받기 어렵겠지만,인간은 자신들의 본성이 무었이었는지를 이념적으로 철학적으로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상시적인 올바른 정치참여가 잘 이루어진다면 인간의 본성을 되찾아 평등하고 자유롭게 잘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높아져 갈 것이다.
* 늑대는 전혀 고독하지 않다. -
늑대는 산 속에서 어울리지 못하고 은둔하면서 폐쇄적으로 살아간다고 여긴다. 대체 누가 외로운 늑대라고 했는가? 그리고 외로운 것은 악한 것인가? 공자는 오늘날 인류의 정신적인 스승이자 벗이지만 자신은 친구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철학적으로 공자를 능가했다는 평을 듣고 있는 니체는 아예 산속으로 은둔해버렸던 철저히 고독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친구맺기나 인맥관리에 혈안이 되어 있는데, 보통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본질을 생각해보자! 본성과 맥이 같은 것이지만 인간존재의 본질, 인간이 사는 이유는 자유와 평등 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자는 이를 수신과 평(등)천하라는 개념으로 역설했고, 철학자 니체도 주체,공동자아,초인세상의 구축을 인류적 과업으로 제시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주체가 되고 치국평천하에 기여하는 것이지,나머지는 부차적인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에겐 수신,평천하의 본능보다 끼리끼리 어울리는 무리본능이 강한 측면이 있다. 오랜 봉건적 집단주의 영향이긴 하나 이게 얼마나 반주체적이고 반사회적이고 반민주적인지 그래서 우리모두를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지를 안다면 의식을 안 바꿀 수가 없을 것이다.
최근 혼술,혼밥이니 해서 집단주의가 약화된 둣한 착시를 일으키지만 주체적인 새로운 정신의 틀이 탄생하는 것과는 거리가 한참 있어보인다. 홀로문화의 확산이라는 것은, 타인의 무의미한 개입과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고, 상대적으로는 유의미한 영향을 주는 것이지, 관계를 끊는 고립이 아니다.
그러나 이 땅에 이기적 집단, 떼거리주의의 폐해가 워낙 큰 만큼 참사회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 인간의 정신이 개화되어가는 과도적 현상으로 보고 이를 긍정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그간,우리는 우정이나 무리,소속을 좋아하고 고독을 싫어하다 보니,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스스로의 자아성을 잃어버리고 살아왔다. 자아를 되찾는 것도 고독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고, 때로 고독을 씹으며 자아중심의 사색을 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철학적 개안을 하는 때가 올 것이다.
한 철인이 늑대와 함께 살면서 우정을 맺고 철학적으로 집필한, <철학자와 늑대>란 책은 늑대를 상찬하고 인간에게 굴욕을 안겨준다. 늑대는 절대로 거짓언행을 하지 않으며, 삶의 매순간을 즐기고 과정을 중시한다는 대목이 인상적인데, 사람들은 결과에 연연해 좌절하고 자살까지 하는 반면,늑대는 외려 실패도 즐긴다 하니 놀랍지 않을 수 없고, 거기에 비해서 인간의 위상은 말이 아니다.그러나 늑대는 단지 정직하기 때문에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점을 준다.
인간과 자아를 직시하고 본성대로 멋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순치된 늑대개처럼 참혹하게 살것인가, 이를 사활적 문제로 삼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