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조선시대에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 : 1786~1841)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가 남긴 문학서 중에서 수여방필(睡餘放筆) 이라는 산문집이 있는데, 그 속에 등장하는 내용중에 공자와 소동파를 인용하면서 '말을 하지 않고 아끼려고 하는 이유' 에 대해서 설명해 놓은 부분이 있다.
『 공자는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소동파는 장안도라는 사람이 말년에 들어 대꾸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공자 같은 성인의 마음이야 헤아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장안도처럼 평범한 사람의 마음이야 능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세상을 오래 살고 많은 일을 겪다 보니,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말 속에는 새로운 깨달음을 일으킬 만한 말이 없고, 이미 케케묵은 말 뿐이어서 듣기만 해도 지겨운데 어찌 대꾸하고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꾸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높고도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다.
요즘 들어 내 귀에 들어오는 말치고 마음에 맞는 말을 찾기가 점점 더 힘들다. 열 가지 말 가운데 서너 가지도 대답하기 어렵다. 간혹 사람들은 나를 두고 거만하다고 비난하지만, 신경 쓸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공자가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한 이유가 나와 같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
우리는 말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말을 하지 않으면 인관간계에서 소외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가급적 많은 사람들과 억지로라도 어울리고 말을 이것 저것 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화를 하면 할수록 인간관계는 더더욱 악화되어져 가는 것이 다반사이다. 대화를 할 수록에 관계가 더 돈독해지는 것이 아니라 갈등의 골만 더 생기는 원인을 파악해보면, 대부분 상대방의 말을 호응해주면서 잘 경청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말을 더 많이 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자기의 생각대로 상대를 끌고가려고 의도하는 말을 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실제로 대화속에는, "말을 위한 말이 많을 경우" 에 상대를 거스르는 말이 나오게끔 되어져 있고, 들어본들 서로에게 도움이 안되는 시간때우기식의 실없는 말을 자꾸 들어줘야 하는 것이 서로에게 거북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주변에 유독 인기가 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을 잘 파악해보면, 그 사람은 상대의 이야기를 잘 이해해주면서 끝까지 잘 들어준다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냥 겸손한 미소를 띄면서 이해하려는 눈빛으로 상대를 보라보고서, 상대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제서야 입을 연다. 그렇게 잘 경청을 해준 댓가는 결국 자신에게 다 돌아온다. 그러나 그것도 한 번 두번이지, 영양가 없고 얻을 것 없는 말을 위한 말을 하다보면, 그 사람의 말을 아예 듣으려고도 안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