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표정이나 말의 문맥상 전혀 이상한 것은 없었다. 누가 들어도 연인 사이나 친구 사이에서 많이들 해 봤을만한 이야기. 그렇지만 내 경우엔 다르다.
K는 언제나 말을 쉽게 하지 않는다.
평소에 어떻게 말을 하는지 어떤 단어들을 주로 사용하는 지를 기억하고 있지 못하면 분명 다르게 표현했다는 그의 말의 속내를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번은 이 정도 친해지고 이 정도 연애했으면 그냥 원하는 거 있으면 편하게 말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한 적이 있다. 분명히 부탁이었다. 강요도 아니었고, 나름 합리적으로 이러면 우리의 관계가 더 좋아 질수 있을 거라는 내가 찾아낸 해답이었으며, 매 대화마다 기억하고 집중하지 않아도 되도록 내가 좀 편하자는 투덜거림도 섞여 있었다.
첫 마디에 숨이 막혔다. 지는 기억이 된다는 뜻이다. 굳이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애정이 너무 넘치기 때문에 바로 바로 평소와 다름을 알 수 있다는 말. 그걸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편치 않게 느낀다는 것은 나의 애정이 부족하는 뜻.
말을 돌렸다. 모르는 척 웃었다. 그렇지 않다고 달려 들어 한바탕 붙어 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붙은 논쟁이나 토론들은 대부분 내 주장이 맞다고 결론이 나든 그의 주장이 맞다고 결론이 나든 간에 언제나 나만 아프게 끝이 났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또 아프고 싶진 않는 나는 말을 돌리는 게 이젠 종종 있는 일이다.
연애를 하면서 처음으로 사람위에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아직 사회 생활을 경험해 보지 못하고 드라마나 책에서만 그들의 위계질서와 상하 관계를 봐왔던 나로서는 꽤나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경험이었다.
웃픈 현실이지만 사실이라는 걸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언제나 떠나갈 것을 걱정하고 그는 그런 걱정들은 근본적인 신뢰를 통해서 조금씩 해소해 나가야 한다고 말을 한다. 짜증이 난다. 물론 표정이나 말, 혹은 손발의 움직임들로 안타깝게도 표현을 할 수는 없지만. 머리속에 크게 써지는 짜.증. 이라는 두 글자를 없애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이 남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다른 어떤 반대 급부적인 재료가 필요하다.
그럴 때 마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하고 그의 눈을 본다. 딱히 눈이 너무 예쁘거나 맘에 든다거나 하는 것이 전혀 아니지만 내가 백치한 표정으로 그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는 그런 나의 행동에서 뭔가를 알아내려고 약간 눈이 켜지면서 날 지켜보기 시작한다. 내 생각을 내 감정을 내 지금 기분을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그의 눈을 보면 사랑 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이내 기분이 너무 좋아진다. 어느 쪽이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왼쪽에 있는 심장의 우심실 뒷편쯤에 있는 사랑과 연관된 내 감각기관이 온몸에 행복감이라고 하는 호르몬을 퍼트림과 동시에 입꼬리는 살짝 위로 올라가도록 안면 근육이 수축한다.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미소'라고하는 것과 굉장히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것과는 달리 어마어마하게 행복하고 어마어마하게 좋다.
모든 좋은 것에는 반대 급부적으로 부작용이 따른다. 잃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언젠가 그가 나에게 이별이라는 것을 전하고 싶어진다면 어떤 방법으로 하게 될까? 라는 질문에 혼자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입버릇 처럼 이야기 하던 말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어짜피 헤어지는 건데 헤어지면 다 끝나는 것데 뭘 굳이 저런 것 까지 생각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복잡한 사람이네 참 쓸데없는 걸 기준으로 만들어 두고 있는 사람이네 정도?
그러다가 두어달 전쯤에 함께 본 영황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이야기 하다가 그에 말에 설득을 당했는지 아니면 원래 그게 맞았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별 또한 잘 해야하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니가 예쁘지 않아서도 아니고 니가 큰 잘못을 해서도 아니고 그냥 사랑이라는 마음이 순식간에 생긴 것처럼 순식간에 없어진 걸 누군가 먼저 깨닫게 된 것일 테니까.
넌 아직도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충분히 예쁘고 괜찮다고 표현하기엔 표현이 모자랄만큼 좋은 사람이야. 다만 사랑을 향해서 치닫던 좋아하는 마음이 그 길을 잃어서 사라진 것 뿐이지.
굳이 누군가의 책임이냐고 묻는다면 그 길을 잃게 놔둔 내 탓일 거야.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말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정리가 되고나서 친구가 되길 니가 원한다면 널 많이 아는 좋은 친구로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언제든 연락해."
내가 술을 먹지 못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나에게. 할 말이 있다는 그가 어렵게 꺼낸 마지막 말이었다. 이야기가 시작하자마자 그 끝을 예상하게 되는. 듣는 내내 헤어진다는 것 때문에 너무 아파서 눈물이 흐를 수도 있었지만 그가 보여주는 배려와 듣는 나를 걱정하는 표정에 우는 것은 돌아가는 길에 혼자 있을 때 하기로 마음 먹었다. 누군가는 내가 속았다고 그가 굉장히 별로인 사람이라고 이야기 할 수 도 있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 내가 좋아 했었다는 걸 자신있게 말 할수 있을 정도로 진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난 안다.
물론 이별 그 자체로는 혼자 일주일 방에 쳐박혀 울기도 하고 세상 모든 것들을 원망하면서 왜 나에게 이런일이 벌어졌는지를 짜증도 내고 그가 없는 것을 슬퍼하기도 하고 받을수 없는 그의 애정들을 그리면서 아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알려준 이별하는 법은 내가 그에게 배운 많은 감정들과 기준들 중에서 나름 쓸만하고 나름 괜찮았고 가끔은 따뜻하게 마저 느껴지는 그런 기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