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30대 후반의 남자이자,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
B 30대 후반의 여자이자, 부인이자, 한 아이의 엄마
C A와 B의 7살 된 아이
하루하루 쫓겨 산다.
아직 이뤄놓은 것은 없는데 우리 아이가 크는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 저 아이를 내 등과 배에 메고 다녔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말도 나보다 잘한다. 이 아이는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사회에 적응해 나가고 있는데 한 가족의 가장이란 나는 사회에서 점차 격리되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
나는 우리 사회의 주류가 아니다. 주류를 떠받들고 있는 비주류의 일원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기틀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의 국민 아닌가? 나는 꿈꿀 자유가 있다.
그래서 10대 후반부터 멋진 꿈을 꾸며 살아왔다. 멋진 아빠가 되는 것,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 많은 돈을 벌어 우리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것. 하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이뤄낸 것이 없다. 그렇다. 나는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 그냥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겼던 것 뿐.
주류로 올라가는 일은 나 같이 빽 없고 돈 없는 사람에게는 너무 멀게 느껴진다. 최근 1~2년간 오른 부동산 가격 때문에 더더욱 멀어진 것을 느낀다. 주위에서는 코인이다, 부동산이다, 주식이다 돈 벌었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실기를 범했다. 상대적인 내 자산은 더욱 줄었고, 아이와 아이 엄마에게 부끄러운 남편이 되었다. 제대로 된 기술 하나 없는 나에게 회사에서는 윗사람 눈치 보는 법밖에 배우지 못했다. 외국에선 용접공 연봉이 1억이 넘는다던데, 그런 기술조차 하나 없는 내가 못나 보인다.
오랜만에 와이프, 아이 우리 세 가족이 여행을 다녀왔다.
겉으로는 가족들을 위한 여행이었지만 내 머릿속에 쌓여있던 응어리를 풀기 위한 목적이 더 컸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 가족에게도 실패한 아빠이자 남편이 되었다. 세상이 호기심으로 가득차 보이는 7살이 된 아이의 응석을 더 이상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잡생각으로 가득차 있던 내 마음이 받아주지 못했다.
화를 냈다. 아이에게도, 이를 말리던 와이프에게도. 이런 뜻이 아니었는데, 왜 나는 점점 더 작아지는 걸까? 과연 내가 아빠로서, 남자로서의 자격이 있는 걸까?
언제부터인가 그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밝게 웃는 모습이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었는데, 미간의 주름이 더 짙어지는 모습을 보니 너무 안타깝다. 퇴근하는 시간도 점점 늦어져 이유를 물어보니 다른 직원이나 팀장이 야근하고 있어서 마음대로 퇴근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회사를 때려치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가 나와 아이를 위해 아침 일찍부터 눈도 못 뜨고 출근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차마 꺼내지 못했다.
나도 사회생활을 했었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직장생활을 계속 해야 할지에 관해 그이와 한참을 얘기했었다. 내가 회사에 다니지 않으면 내야 할 전세자금대출 이자와 생활비로 적금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이가 엄마 품에서 자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우리는 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때부터였다.
그이는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출근하기 시작했고, 퇴근 시간도 점차 늦어졌다. 이전엔 나름대로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자신의 주장도 관철하는 남편이었는데, 언젠가부터 회사에 조금 더 충실해졌다. 그런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나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느꼈었기 때문에 그의 모습이 더욱 안쓰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주말에는 회사에 남은 일을 하러 가거나 누워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던 남편이었는데 여행을 가자니 나도 조금은 들떴다. 하지만, 남편은 여행 중에도 많이 피곤해 보였고,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이 말이 없었다. 아이가 조금만 보채도 그는 받아주지 못했다. 이 모습에 나도 너무 속상해 남편과 말다툼을 하면서 우리의 오랜만에 나들이는 끝이 났다.
어쩌다가 내 선량하고 웃는 모습이 이뻤던 남편이 이렇게 변했을까? 정말 남편이 잘못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나도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걸까? 오늘은 참 속상한 하루다.
아빠!
오늘 아빠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정말 오랜만에 아빠를 보니 유치원에서 친구들하고 놀았던 것하고 사탕 먹었던 것 하고 종이접기했던 것을 모두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요즘 아빠가 집에 늦게 들어와서 얼굴을 많이 못 봤는데 오랜만에 아빠 엄마하고 주말에 놀러 나가니 마음이 너무 들떠있었나 봐요.
아빠가 회사 마치고 빨리 집에 왔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아빠가 집에 들어오실 때 젤리도 사다 주고 붕어빵도 사다 주고 아이스크림도 사가지고 왔는데 요즘은 맛있는 것을 가져다주는 아빠가 없어서 싫어요.
그래도 아빠 사랑해요! 다음에 우리 또 놀러 가요!!! 그땐 제가 말 잘 들을게요!!
항상 틀린 건 나였다.
나만 마음이 바빴을 뿐, 마음이 바쁘다고 해결된 것도 없었고 해결될 것도 없다. 내가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왜 내가 힘들고 그들이 힘들어야 깨닫는 것인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바보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