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조지 버클리의 지각되지 않는 존재 (자가당착)
"숲 속에서 큰 나무가 쓰러졌는데, 이 광경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면 나무는 과연 쓰러진 것인가?
조지 버클리 (George Berkeley 1685년 3월 12일 – 1753년 1월 14일) 아일랜드의 철학자이자, 성공회 주교이다.
버클리의 철학은 우리가 지각하는 것만이 실체이며, 지각하지 못하는 것의 실체는 없다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Esse est percipi)"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는 극단적인 경험론에 속한다.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지각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끝에 1709년 발표한 《새로운 시각 이론에 관한 시론(An 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으로 처음 주목을 받았다. 당시에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오늘날 그의 결론은 기초적 광학이론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그 이론은 물질적인 것은 없고, 오직 정신적인 사건과 그것을 지각하는 사고방식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나름대로 해석
조지 버클리에 의하면 아무도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지각을 못했다면 나무의 실체는 없는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보던 안보던 나무는 쓰러진 겁니다.
버클리는 그의 이론에 있어서 가장 극단적인 경험주의 (Empiricism)를 추구했습니다. 극단적인 경험주의는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경험만이 중요한데 자신만의 경험만이 중요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경험은 자신의 경험이 아니기에 무시하게 되는 독단에 빠지게 됩니다.
누군가 열심히 살았다고 믿었는데 아무도 그 사람의 열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열심히 산 것일까요 아니면 아무것도 아닐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입장에서 봤느냐는 겁니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열심히 살았지만 누구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면, 누구도 실체를 인정할 수 없다면 열심이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만 알고 있는 진실은 진실일까요 아니면 아무도 모르기에 실체가 없는 것일까요?
비판철학
비판철학 이전의 근대 철학에 두 개의 큰 조류가 있다. 하나는 F. 베이컨, 홉스, 로크, 버클리, 흄으로 전개되는 영국 경험주의의 흐름이다. 또 하나는 데카르트, 말브랑슈,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볼프로 전개되는 대륙 이성주의의 흐름이다.
비판철학은 근대 철학의 분수령이라고 말해진다. 그것은 비판철학이 그 이전의 경험주의와 이성주의를 종합하는 것이고, 또한 그 이후의 독일 관념론 전개의 기점으로 된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순수이성비판』의 '서론'에서 칸트는 모든 인식은 "경험과 함께" 시작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식이 "경험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인식에서 사실문제와 권리문제는 구별되어야만 한다. 사실문제에 관해서는 경험주의가 주장하는 대로이다. 그러나 권리문제에 관해서는 이성주의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종류의 선험적 인식, 요컨대 생득관념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경험주의의 입장에서는 권리문제가 사실문제로 환원되어버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험주의 [經驗主義, Empirismus] (칸트사전, 2009. 10. 1., 도서출판 b)
순수이성비판에 나타난 칸트의 비판주의 입장
즉, 독단론이나 회의론에 빠지는 것을 피하고 이성의 자기인식을 규명하는 것이 비판주의의 입장으로, 그에 의하면 비판이란 책이나 체계의 비판이 아니라, 일체의 경험에서 독립하여 얻어지는 인식에 관한 이성 능력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였다.
회의주의 (scepticism)
인간의 감각이나 인식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므로 이러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보편 타당한 절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는 철학사상.
독단론의 자기모순
우리 인식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자체'의 존재를 인정하는 '독단론'은 이로 인해 모든 것을 자기 안에 정립하는 '자아'에 머물지 못하고 자아 너머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독단론'은 그 이론 자신이 추구하는 원칙에 근거해서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된다. 독단론이 가정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스피노자주의인데 이 역시 자신의 원칙을 고려해 볼 때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것이다.
즉 '독단론의 원칙'은 근거 없이는 아무것도 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단론은 결국 자신이 의심한다는 것을 의심하는 회의론에 빠지고 만다.
[네이버 지식백과] 독단론의 자기모순 (피히테 『전체 지식학의 기초』 (해제), 2005.,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자가당착 (自家撞着)
自(자)-스스로, 家(가)-집, 撞(당)-부딪치다, 着(착)-붙다
자기의 언행이 모순되다. 자가(自家)는 자신을 뜻한다. 당착(撞着)은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곧 자기의 말과 행동에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회의에 빠지거나 독단론의 자기모순으로 향하게 되는 이유는 자가당착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언행이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경험에만 의지하면 다른 사람의 권리나 경험을 무시하게 되고 너무 이성에만 의지하면 실직적인 실체의 부족으로 자신이 의심하는 것을 의심하게 되는 회의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칸트의 말씀처럼
모든 인식은 "경험과 함께" 시작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식이 "경험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종교적으로 보면 기독교는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기에 독단론에 빠지게 됩니다. 분명히 다른 종교와 다른 신이 존재하는 현실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무시하는 무례를 저지릅니다. 종교 깡패가 되는 자가당착.
반대로 불교는 자신의 경험을 믿지 못하는 회의주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 것도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한 곳에 빠져서 관념을 만들지 말라는 것인데. 불교라는 실체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자가당착.
"숲 속에서 큰 나무가 쓰러졌는데, 이 광경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면 나무는 과연 쓰러진 것인가?
나무가 쓰러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은 인식의 문제입니다. 사실과 인식을 구분해야 하고 자신의 경험을 믿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경험도 들어봐야 합니다.
이율배반적인 자가당착에 빠지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