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조율사, 팝아티스트 VERIL

thelum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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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의 조율사, 팝아티스트 VER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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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om / ⓒVERIL(이용택)






“용택이형, 혹시 인터뷰 할래요? 요즘 제가 재야의 고수들을 만나서 기사 쓰고 있거든요”

“오랜만이다 오쟁! 근데 인터뷰? 그냥 만나서 술 마시면 되는 거지?”

“네, 뭐., 그럼 그때 봐요:)”

그를 못 알아봤다. 그는 두 배가 되어 있었다. 후덕한 뱃살이 인덕에 비례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용택이형은 그간 늘어난 뱃살만큼 두 배로 좋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10여년 전, 용택이형과 나는 어느 길바닥에서 우연히 만났다. 캔버스를 앞에 두고 세잔이나 고흐처럼 눈앞의 풍경을 어떻게 그림으로 번역할 것인가를 각자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절이었다. 우린 금방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망했다. 약속한 날, 수첩에 빼곡하게 적어간 질문은 하나도 못 하고 술만 마시다가 필름이 끊겼다. 아니 뭔가를 물어보긴 했었던 것 같다. 용택이형이 뭐라고 답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맛있는 곱창과 소맥이 있는 장소에서는 인터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렇게 하기로 한다. 내가 알고 있었던 그와, 술김에 주고받았던 흐릿한 대화와, 다음날 서면으로 주고받았던 질문지를 고추장에 넣고 잘 비벼서 팝아티스트 VERIL(이용택)을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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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티스트 VERIL이 경북 봉화에서 그린 그림들 ⓒVERIL(이용택)





눈앞의 풍경 : 반고흐처럼



‘시골에 살면서 그림만 그려보고 싶다’ 라는 화가로서의 로망은 언제나 상상에서 그치기 마련이다. 용택이형은 나와 달랐다. 7년 전, 그는 갑자기 화구를 챙겨 시골로 떠났다. 경북 봉화의 한 마을에 3개월 동안 기거했다. 그리고 매일 밖으로 나가 캔버스에 물감을 남겼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네, 세잔, 고흐의 삶을 비록 3개월이지만 완벽하게 구현한 것이다. 그 기간에 나는 매일 밤, 그의 블로그에 올라오는 그림을 기다렸다.

그리기란 무엇일까.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것은 쉽다. 더 깊게 들어가면 골치 아파진다. ‘눈에 보이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보이는 것 중에 ‘뭘 집중해서 볼 것인지’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용택이형의 풍경화를 보면 그가 보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쾌하다. “풍경만큼 좋은 친구이자 스승은 없어” 라고 말하는 그의 풍경화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음을 조화롭게 만드는 피아노 조율사가 있다면, 용택이형은 색을 마음대로 구사하고 재조합할 수 있는 색의 조율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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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2'00.54"N 139°46'13.43"E Tokyo, Japan / ⓒVERIL(이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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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어스로 전 세계를 클릭하며 그린 그림들 / ⓒVERIL(이용택)





가보지 않은 좌표 풍경 : Cube Earth



자연과 물감이라는, 전통적인 작업 방식에 지루함을 느꼈던 것일까? 서울로 돌아온 그는 “현대적이고 싶은 마음”에 도시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전에 야외에서 직접 본 자연 풍경을 그렸다면, 이제는 구글어스를 돌아다니며 모니터 속 도시 풍경을 디지털 페인팅으로 시도했다. 부다페스트, 뮌휀, 도쿄 등 그는 어디라도 갈 수 있었다. 마우스로 클릭하는 여행에는 어떤 제약도 없었다. 용택이형은 가보지 않은 낯선 도시인의 삶을 마주하며, 체험할 수 없었던 현장의 공기를 오로지 상상으로만 채워 넣었다. 역시 색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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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om10 / ⓒVERIL(이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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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풍경을 그린 Room 시리즈 / ⓒVERIL(이용택)





내면의 풍경 : ROOM



실제로 보았든, 모니터를 통해 보았든, 아무튼 ‘뭘 보고’ 그렸던 용택이형은 결혼 후에 뭘 보고 그리지 않기 시작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바깥보다는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결혼 후에 나만의 방이 없어져서 괴로웠어. 그래서 마음의 공간을 그리고 있어. 생각보다 위로가 되더라.” 그의 'ROOM' 시리즈를 보면 방이 가득하다. 방은 수영장이 되었다가 갤러리로 변하고, 이내 큰 침대가 있는 스위트룸으로 바뀐다.

가난의 맛을 봐야 위대한 작품이 탄생한다는 전근대적인 예술가의 이미지가 사람들 인식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또 그것을 낭만으로 포장하는 이들도 있다. 뭘 모르는 소리다. 오로지 최상의 환경이 최상의 작업을 탄생시킬 뿐이다. 이러면 곧장 반고흐의 삶을 떠올릴 것이다. 나는 장담한다. 반고흐가 호텔 스위트 룸에 기거했다면, 그래서 매일 맛있는 조식을 먹었다면 지금 우리가 아는 그림보다 훨씬 더 좋은 그림을 남겼을 것이다. 용택이형의 'ROOM' 시리즈가 현실로 실현될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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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앤디워홀, 리히텐슈타인, 고갱, 세잔, 보나르, 키스헤링, 반고흐, 세잔 / ⓒVERIL(이용택)





모든 작가에겐 작업의 레퍼런스가 있기 마련이다. 용택이형이 그린 아티스트 초상화 시리즈를 보면 왜 그렸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앤디워홀, 리히텐슈타인, 고갱, 세잔, 보나르, 키스헤링, 반고흐, 세잔. 모두 그의 그림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음엔 과학자 인물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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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 ⓒVERIL(이용택)





우리가 마시고 있는 게 술인지 물인지 몰랐을 무렵, 돼지껍데기를 입에 넣으며 용택이형과 나눴던 대화가 희미하게 떠오른다.



“야 오쟁, 나는 꿈이 있어”

“뭔데? 아까 말했던 인스타 팔로우 만 명?”

“ㅋㅋㅋ 아니야. 나중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취미로 풍경을 그리고 다니는 거야”

“그럼 돈 짱 많이 벌어야 되잖아. 그러려면 팔로우 최소 만 명은 되어야 한다고”

“아 그런가...씁..”

“그런데, 왜 풍경을 계속 그리고 싶은 거야? 최종적으로 뭘 그려내고 싶은 거야?”

“내가 그림에서 바라는 것은 명쾌한 세상이야. 그림에서만큼은 내가 바라봐야 할 것들, 바라보고 싶은 것을 선명하게 볼 수 있잖아. 난 그러한 것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결국 내 삶도 내 그림처럼 흘러가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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