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아있는 나날 (The Remains of the Day)'은 1989년 노벨상 수상자인 일본 태생의 영국 작가 카즈오 이시구로 (Kazuo Ishiguro)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라는군요. 그 소설은 이미 그 해에 맨부커상을 수상했다고도 합니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은 이 소설을 원작으로 1993년에 동명의 영화를 제작하였고 아카데미는 이 영화를 8개 부문에나 노미네이트했다고 하네요.
어제밤 아무 생각 없이 EBS의 '세계의 명화'에서 우연히 이 영화를 봤습니다. 미리 적자면 제 영화 취향은 할리우드 액션이나 SF이고 한때 홍콩 느와르를 즐겨 본 정도로 어디다 드러낼 형편은 못 됩니다.
사실 이 영화도 원작을 본 것도 아니고 감독도 처음 들어보는 이고 출연한 배우들도 꽤 이름이 알려진 배우들이지만 딱히 제가 뭐 열광하는 배우들도 아니고 해서 그야말로 주말 밤 시간이나 죽일 작정이었습니다.
결론은 무심코 던진 낚싯대의 소소한 입질에 아무 생각 없이 챔질을 했는데 왠걸 '묵직한' 손맛을 본 것이라고 할까요.
제가 맛 본 묵직함의 몫은 많은 부분, 스티븐슨 집사를 연기한 Anthony Hopkins의 것입니다.
스포일러가 다소 걱정되긴 합니다.
영화는 집사 스티븐슨이 이미 2차대전이 끝난 1950년대의 어느 날, 20여년 전 함께 일했던 유능했던 하녀장 미스 켄턴의 편지를 받고 그녀를 찾아가는 6일간의 여행 이야기이고 그러면서 기억하는 20여년 전 기억에 관한 얘기입니다.
도입부터 영화는 집사 스티븐슨이란 인물의 내면을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듯이 그 여행의 당위를 관객에게 설득하는 방식으로 그의 페르소나를 선택합니다. 아침식사 준비의 어수선함, 태운 빵에 대한 주인 루이스의 무심한 코멘트 등은 미스 켄턴의 편지와 함께 그로 하여금 미스 켄턴을 소환할 명분을 충분히 만들어 줍니다. 주인 루이스의 다소 지나쳐 보이는 호의가 명분을 압도할 수도 있었지만 명분은 언제나 명분일 따름입니다. 페르소나는 명분이 있어야 속을 드러내지 않고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소니 홉킨스는 지금, 그러니까 여행을 시작할 당시 여전히 그 저택의 집사지만 주인은 바뀌었죠. 루이스란 은퇴한 미상원의원이 그 저택을 인수했고 20여년 전인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던 그때는 영국의 귀족인 달링턴 경의 집사였습니다. 양들의 침묵에서 봤던 섬뜩한 느낌이 워낙 강하게 각인돼있어 나도 모르게 살짝 피하는 배우였지만 연기력만큼은 자타가 공인합니다. 그러니까 원작이나 감독이 드러내고자 하는 인물을 유일무이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한 인격으로 표현하는 것을 연기력이라고 한다면 말이죠.
아마도 지나친 페르소나 동일시가 제 삶을 압도한다는 판단이 이 인물에 끌린 이유인 모양입니다. 영화는 미묘하게, 즉 지나치지 않게, 하지만 시종일관 이 인물의 페르소나와 내면의 갈등을 추적합니다. 그리고 매번, 끝내는 마지막까지도 페르소나의 우위를 드러냅니다.
비 내리는 늦은 저녁, 그날 따라 정시에 도착한 버스의 난간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여인은 떠나갑니다. 이젠 늙은 스티븐슨은 그 빗 속에서 우산을 들고 떠나는 여인에게 가장 형식적인 작별인사를 그나마 두번 합니다. 그렇게 스티븐슨은 페르소나의 벽을 넘어서지 못 합니다. 사실 본인의 선택이기도 합니다.
아버지 역시 페르소나 동일시의 전형입니다. 청소도구 운반기를 붙들고 정신을 잃은 채 무릎을 꿇은 모습. 찻주전자와 찻잔을 올린 쟁반을 들고 넘어졌던 돌 바닥을 다음 날 아침, 발로 바닥을 고르고 다신 넘어지지 않기위해 반복해서 연습해 보는 모습. 숭고한가요? 순간적인 뇌졸중으로 생을 고통 없이 마감했을 것이라는 의사의 코멘트는 마치 페르소나 동일시란 삶의 편리를 비꼬는 것 같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숭고하지도 편리하지도 않습니다.
엄마의 외도로 더 이상 엄마를 사랑하진 않았지만 아버지로서는 충실했다고 아버지는 고백합니다. 이런 가정사는 스티븐슨으로 하여금 당시의 사회문화적 영향만큼이나 개인적으로 페르소나 동일시의 당위를 관객에게 설득합니다. 스스로 넘어서기엔 너무 높은 자기 굴레를 설득합니다. 그래서 슬픕니다.
어느날, 주인인 달링턴 경은 며칠 앞으로 다가온 자신의 저택에서의 국제회의 준비 탓에 그렇지 않아도 곤혹스런, 의지할데 없는 대자의 결혼 초야를 위한 사전지식 전수를 스티븐슨에게 예의를 갖춰 부탁합니다. 거절 못 하고 수락은 했지만 사실 스티븐슨에겐 더 곤혹스런 상황입니다. 하지만 대자인 휴그랜트에겐 이게 필요했을까요? 사실 페르소나에겐 실제 상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페르소나가 가상한 상대니까요.
물론 페르소나 동일시는 겉으로 보기엔 그다지 불행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페르소나를 버렸던 이들은 영화에서도 암시하듯 현실의 고통을 피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요. 하녀 리지의 결혼에 그런 우려를 드러냈던 미스 켄턴 역시 벤과의 결혼이 고통스러웠으니까요. 그래서인지 마지막에선 명분을 택하고마는 미스 켄턴을 보면 인생은 아이러니입니다. 페르소나에겐 실제의 상대가 중요하지 않은 만큼 실제의 자기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페르소나는 한때 인류가 믿고 의지했던 신과도 비슷하단 생각이 드는군요. 그 안에선 평화로왔을 지도 모르니까요. 혹은 죽음처럼 피할 수 없는 숙명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비록 이미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끝끝내 결연히 그 몸부림을 멈출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