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집니다. 길지만 하나의 소제목 아래 씌여진 것이라서 한번에 올립니다.
'unconditioned'를 조건화 되지 않음으로 'conditioned'를 조건화 됨으로 번역하고나서 아무래도 어색해서 찾아보니 무위와 유위가 가장 적절한 번역같아 바꿔봤습니다.
출처 : https://aeon.co/essays/nirvana-can-seem-an-exotic-metaphysical-idea-until-you-look-closer
열반이란 무엇인가?
윤회로부터 자유로와진다는 것이 불교를 믿지 않은 이들에겐 무의미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반은 또한 깊은 심리학적 목표이기도 합니다.
Robert Wright
is visiting professor of science and religion at Union Theological Seminary. He is the author of The Moral Animal (1994), Nonzero (1999), The Evolution of God (2009), and, most recently, Why Buddhism is True (2017).
제 개인 체험으로 첫번째 종류의 열반을 묘사할 수 없어 유감스럽고 두 번째 종류를 묘사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반반입니다. 그러나 요점은 당신이 집중하고 있는 열반이 어떤 것이든 마음챙김 명상은 거기에 이르는 도전에 직접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챙김은 여러분이 갖는 느낌이 그 느낌의 대상과 맺고 있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알아차림을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나쁜' 느낌을 벗어나기 위해 불편하게 싸우거나 '좋은' 느낌에 머무르기 위해 절망적이고도 헛되게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수행을 한다면 여러분은 일종의 냉정이나 '붙어있지 않음'과 같은 느낌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이국적이던(불교적인 수행 목표에 충실하던, 역자 주), 혹은 당신이 뜻하는 바가 얼마나 실제적이든(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역자 주) 상관 없이, 그러니까 윤회를 믿고 거기서 자유로와지는 것이든, 혹은 단지 지금 여기에서 자유를 완전히 얻는 것이든, 혹은 지금 여기에서 부분적으로만이라도 자유로와지는 것을 발견하는 것을 원하든, 자유를 얻기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는 마음챙김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바탕이 되는 용어는 같습니다. 여러분이 12연기의 영원한 반복에서 벗어나고자 하기보다는 단지 그저 유일한 삶이 더 나아지기를 원하기만 할지라도 여러분을 옭아매고 있는 인과 사슬, 그러니까 조건들로부터의 자유를 여전히 구할 것입니다. 보이는 것들, 소리들, 사람들, 뉴스, 그리고 영상들과 같은 주위의 것들은 반응이 시작되도록 버튼을 누를 것이고 그러므로써 미묘한 느낌이 일어나게 되고 그 느낌은 또 일련의 생각들을 일어나게 하며 결국은 당신의 행동이 일어나게 합니다. 물론 그 일련의 반응은 때때로 여러분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당신이 더 마음챙김을 하지 않으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즉 반응적이 아니고 반사적으로 반응하면 그것들은 계속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정신에 있어서 인간 조건에 대한 고대 불교도의 평가가 매우 현대적이라는 것을 지적합니다. 인간의 뇌는 감각이란 입력에 매우 반사적으로 반응하도록 자연선택에 의해 고안된 기계장치입니다. 어떤 점에선 그 입력에 의해 조절되도록 고안되었습니다. 그 조절기전에서의 열쇠는 입력에 반응해서 일어나는 느낌들입니다. 도넛의 냄새가 좋고 그래서 우리는 다가갑니다 ; 참을 수 없는 허기는 나쁜 느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 말하자면 도넛을 먹음으로써 ; 사회적 지위는 좋고 어리석음은 나쁜 느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추구하거나 피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tanha에 따라 느껴지는 것에 반응한다면 - 유쾌한 느낌에 대한 자연적이고 반사적인 갈증이나 불쾌한 느낌에 대한 자연적이고 반사적인 혐오에 따라 - 여러분은 주위 세상에 의해 계속해서 통제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런 느낌들에 단지 반응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마음챙김 해서 바라본다면 여러분은 어느 정도 그 통제에서 벗어나고 ; 평범하게 여러분의 행동을 결정했던 원인들은 무시되고 무위에 보다 더 가까이 갈 것입니다.
열반과 무위를 얼마나 극적으로 생각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 불교 안에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 완전하게 해방된 초월적 형이상학의 공간과 같은 것이 있을까요?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반응했다면 아마도 여러분을 통제했을 그 원인이나 조건으로부터의 무위, 즉 원인이나 조건으로부터의 해방과 같이 다소 더 평범한 것일까요? 자연주의적 불교를 받아들이고 윤회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덜 극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 중 일부는 무위가 너무 극적으로 들리므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세속적 불교'를 주장했고 '신앙 없는 불교'(1997)의 저자이기도 한 Stephen Batchelor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무위 같은 것은 없다. 단지 무위의 가능성만 있다.'
개인적으로, 저는 '세속적' 불교도라도 무위란 용어를 사용하지 못 하게 하고싶지는 않습니다. 형이상학적 영역이 아니고 일종의 은유적 영역으로써 지금 여기에서의 완전한 자유를 생각하는 것은 유용합니다. 또한 그 영역이 실제로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든, 아니면 그저 더 가까이 다가갈 수만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든 관계없이 이는 유용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마치 어떤 영역처럼 느껴지는 무엇인가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첫 일주일간의 침묵 명상을 마친 후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제가 그것에 관해 어떤 말도 하기 전이었음에도 아내는 제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들렸다고 말했습니다. 테너인 제 목소리가 다르게 들렸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새로운 테너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이제 저는 이것이 새로운 테너보다 오래된 테너에 대한 언급을 하려합니다. 몇 년 전에 아내는 제 형제에 대해 좋다는 것을 표현하면서 제게 '그는 당신의 멋진 버전과 같네요.'라고 하더군요. (그때 그녀는 웃었는데, 저는 그것을 좋은 신호로 받아들이기는 했습니다.) 어쨌든 요점은 테너에게 진정한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제가 보기에 세상에는 새로운 테너가 나타났습니다. 저는 제 주변의 사람들과 사물에서 새로운 종류의 기쁨을 취하고자 하는 평소의 자기 중심적 자세의 많은 부분을 버렸습니다. 저는 더 열려 있었고 낯선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했습니다. 세상은 새롭게 활기차고 공명하는듯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