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 밤입니다. 상처받은 분들에겐 이 밤이 더욱 무심해 보입니다.
잠깐 구글로 무심이란 단어를 검색하니 불교용어사전이란 출처에는 '그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 것’ 또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라고 합니다. 하긴 밤이야 뭣 한다고 어디에 마음을 두겠습니까?
다시 국어사전을 찾으니 '남의 일에 걱정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다.'라고 되어 있군요. 밤이 누굴 걱정할리 만무합니다.
'상처'를 포스팅 했습니다. 내내 '도데체 누가, 어떤 것들이 상처받은 이로 하여금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힘겹게 용기를 내서 말문을 열었다가도 이내 또 상처를 받고는 이전보다 더 굳게 마음의 문을 닫아거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건조하게 저항이라고 적었습니다.
상처받음이란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상처로 굳어진 마음의 문을 열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정답이 있기는 할까요?
그저 떠오르는 것들을 적어봅니다. 가장 먼저 '함께 있음'이 떠오릅니다. 경청과 공감도 떠오르는군요. 위로나 격려, 칭찬, 따뜻한 미소나 친절을 보여주는 것도 있겠고. 희망을 줄 수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누군가가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진정성이 담겨야 합니다. 문 닫은 이가 그것을 느낄 시간도 필요합니다. 순탄치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역시 상처받은 이가 문을 열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중도에 닫아건다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결국 스스로 용기를 내야만 하나요? 함께 있고자 하는 이와 함께 있으려는 용기가 필요한가요?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상처 준 이를 철저히, 또 충분히 미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상처가, 또 상처받은 내가 있는 그대로 보여야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그 상처를, 또 상처받은 나를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여야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그렇게 충분히 위로하고 나서야 상대가 있는 그대로 보인다고 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용서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그 모든 것들에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감사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래서 상처는 온전히 상처받은 사람의 몫인 모양인지도 모릅니다.
알에서 나오려는 병아리는 용기를 내서 껍질을 쪼아야 한답니다. 그제서야 어미 닭은 그 소리를 듣고 바깥에서 알을 쪼아 병아리를 돕는다고 합니다. 결국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병아리의 몫인 모양입니다.
이 밤처럼 무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