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1학년을 마치고 또 시간은 흘러 정수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여름방학을 앞 둔 때였다. 별로 친하진 않았지만 교복 바지 주머니에 똑딱 단추를 달고 나팔 모양으로 밑단을 넓힌, 당시로선 최첨단으로 트렌디하게 교복을 입던 호진이가 제안을 하나 했다. 종로에 가면 어마무시한 학원들이 즐비한데 그곳에 가면 저렴한 가격에 엄청난 강의를 들을 수 있다고. 영문법 단과반 강좌를 듣자는 얘기였다.
수업료는 정확히 기억에 없지만 아마 한 과목에 천오백원인가 했던 것 같다. 어찌어찌 등록을 하고 들어간 강의실은 가히 놀라왔다.
족히 삼백명은 됨직한 학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남녀 구분은 따로 없었다. 봄날 꽃처럼 화사한 여학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 웃음 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호진이는 어느새 여학생들 틈 속으로 사라졌고 낙동강 오리알 마냥 정수도 학생들 틈에 파묻혔다. 쑥맥도 그런 쑥맥이 없는 정수에게 그런 제안을 한 이유는 지금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헌데 정작 놀라왔던 것은 그 다음이었다. 정수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학교 수업 시간에는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 했던 영문법의 기본이 귀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S V, S V C, S V O, S V IO DO, S V O C. 5형식이 일목요연해 지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정수는 이문동에서 종로까지를 매일 걸었다. 시간은 많았고 차비는 없었다. 수업 시간은 그야말로 기쁨의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유머를 섞어가며 학생들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사실 정수는 중학교에 입학하고나서야 알파벳을 익혔다. 처음엔 잉크를 찍어 펜 끝으로 글씨를 그렸었다. 'HI! Tom.', 'Hi! Mr. Baker. I am glad to meet you.' 등속을 들으며 교과서에 삽입된 삽화를 보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발음기호니 문장의 형식이니 하는 소린 먼 우주공간에서 날아온 이해할 수 없는 외계의 말들이었다.
그러던 정수가 그때부터 영어가 재미있어졌다. 영어 문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집에선 영어 문장을 일부러 큰 소리로 읽었다. 밖에서 듣고 계실 엄마의 흐믓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때 경험한 '영어의 재발견'은 순전히 호진이 몫이다. 학원 선생님께도 감사를 표해야 마땅하다. 물론 입시에서 반짝이는 영어다. 하지만 공부를 알게된 것은 '영어의 재발견'이 그 구체적 시작이었다.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도 지나고 보면 누군가에게 엄청난 변화를 선물하곤 한다. 항상 고개 숙일 일이다.
내친 김에 정수는 수학 문제집도 샀다. 책 제목은 기억에 없다. 크지도 두껍지도 않았지만 반은 깨알같은 글씨로 문제만 가득하고 후반부 반은 더 작은 글씨로 쓰인 풀이였다. 앞 문제의 풀이에서 나온 것은 그 부분에 대한 인용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앞으로 돌아가서 문제를 확인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정수에겐 시간이 많았다. 필요한 것은 인내였다.
한 문제, 한 문제를 풀어가되 풀이가 끝나기 전엔 해답과 대조하지 않았다. 풀이 과정이 납득될 때까지 풀고 또 풀었다. 필요할 때는 교과서를 찾아 해당 단원을 다시 공부하고 풀었다. 그러던 어느날 정수는 해답과는 다른 풀이 과정으로 그 문제가 풀렸음을 알았다. 풀이 과정을 꼼꼼히 살펴봤지만 잘 못 된 고리는 없었다.
유레카!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였고 '독서백편이면 의자현'이었다. 지적 허영을 만끽하려면 '안광이 지배를 철'하면 그만이었다.
동시에 정수는 그때 깨달았다. 할 수 있는 게 공부 밖에 없다는 것을. 영악했다. 그때 정수는 결심했다. 죽도록 공부만 하겠다고. 그렇게 극단적이었다. 공부는 그간 받아왔던 세상으로부터의 피해(정수가 갖고있던 피해의식으로 말미암은)를 되갚아줄 유일한 길이었다.
더구나 권력도 무상하고 범죄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깨우친 터였다.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을 잡으려다 빠져 죽은 미소년이 수선화로 다시 피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