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년 즈음 정수의 내면에서 일어난 변주가 드러난 것은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였다.
사실 그 전에도 정수의 기억에 깊게 뿌리 내린 사건이 하나 있다. 1학년 2학기 초였다. 여전히 말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상위 10%정도의 성적과 미술 시간이면 보여주던 나름의 기량은 그대로였다.
하루는 반장이던 영준이가 정수에게 다가왔다. 평소 말을 섞을 일은 없는 사이였다. 다만 반장이기도 했고 참 젊잖다고 여기고는 있었다. 방과 후에 자기 집에서 환경미화 작업을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내키진 않았지만 거절을 잘 못 하는 정수는 그만 그러마고 대답을 했다.
수업이 끝나고 함께 버스를 타고 영준이네 집 동네에서 버스를 내렸다. 정수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시작했다. 지나며 봐왔던 으리으리한 2층집들이 즐비한 거기였다. 같은 학교 3학년으로 전교 학생회장이었던 영준이 형도 그 순간 기억났다. 뽀얀 얼굴과 훤칠한 키, 예의 바르면서도 단호한 말투와 태도도 동시에 떠올랐다. 정수의 시커먼 얼굴, 튀어나온 입술, 비쩍 마른 몸이 오버래됐다. 그야말로 우아한 문명인과 미개인의 차이라고나 할까?
겁이 덜컥 났다. 실수로 음료수 컵을 엎진 않을지, 기운 양말을 들키는 건 아닌지, 지저분하다고 인상을 찌푸리시진 않을지.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커다란 대문 앞에서 급기야 정수는 얼어버렸다. 영준이가 '초인종(정수에게 초인종은 TV에서만 보던 넓고 근사한 집의 상징이었다)'을 누르는 순간, 정수는 꽁무니가 빠지게 줄행랑을 쳤었다.
육십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마치 그때로 돌아간듯 가슴이 뛰고 식은 땀이 흘렀다.
그나마 기억하던 지나간 사건들은 부당한 힘에 당한 것이라고 강변할 여지가 있었다. 대적할 수 없는 힘 앞에 무력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그런대로 봐줄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조금 달랐다.
반장이나 회장들 가운데는 선생님의 용인 아래 권력을 휘두르는 아이도 있었고 농담이나 줏어넘기며 웃음으로 호의를 유인하거나 마치 아이들의 대변자라도 된 듯 정의로와 보이려는 그런 애들은 많았다. 그때마다 정수는 내보일 순 없었어도 마땅치 않았다. 그런 것에 열광하는 아이들을 속으로 비웃었다. 그건 정수를 지탱하던 얄팍한 자존심이었다.
영준이는 하지만 달랐다. 어린 마음에도 존경심마저 갖게 할 정도로 지나치거나 부족함이 없는, 대인의 풍모가 느껴지는 온화한 아이였다. 더구나 그날도 평소 친하지도 않았는데도 학급을 위해 뭔가를 함께 하자고, 그것도 자기집으로 초대를 한 것 아닌가?
부끄러웠다. 얄팍했던 자존심은 여지 없이 무너졌고 민낯이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2층 집과 대문, 그리고 초인종에 압도된 것이었다.
부자라고, 힘있는 사람이라고 미워할 순 없었다. 그들 가운데도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따뜻한 사람도 있었고 힘을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넘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는 공연한 분노를 만들고 그것은 얄팍한 자존심을 덮고 그 밑에 숨어있었다. 그날은 그것을 발견한 날이었다.
강렬하게 남은 기억은 결코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