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를 봤습니다.
저흰 페르소나로 살아갑니다. 특히나 현실이란 절박함이 클수록, 혹는 현실에서의 욕망이 클수록 보여지는 것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페르소나 지향의 정도는 그만큼 짙은 그림자를 무의식에 드리웁니다.
현실이란 것이 지니는 몇 가지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변화무쌍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따르는 제 페르소나 역시 변화무쌍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고객이나 상사에게 민낯을 그대로 보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또 일터에서 느낀 분노를 집으로 고스란히 갖고 올 수도 없습니다. 뺨을 맞았다고 엄한데다 풀 수는 없으니까요.
'변검'을 보고 놀랐던 것은 페르소나의 변화무쌍함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쉽게 표정을 바꾸던 절 봤으니까요. 변화무쌍의 주된 동인은 현실에서 갖는 욕망, 그것입니다. 어렸을 적엔 절박이었다고 해둡시다.
전체 정신은, 또 무의식은 자율성을 지닌다고 합니다. 스스로 의식과의 균형,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 없이 일방을 견제합니다. 그림자의 빛깔이 어두울수록, 그러니까 의식이 더 빛날수록 그 견제는 소란해집니다. 아우성이 커집니다. 그 아우성은 신경증으로, 그러니까 더 미숙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투사는 그 중에 대표입니다.
투사는 더 가까운 사람에게서 두드러질 수 밖에 없습니다.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화도 난다는 것은 사실 더 강렬한 투사가 일어났다는 것의 다른 말입니다. 해서 이웃의 아이에겐 공감이 되어도 제 자식에겐 화부터 나는 것일 겝니다. 가까운 누군가의 아내는 현명해 보여도 제 아내는 고집불통이고 잔소리꾼인 것입니다. 화가 납니다.
화는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소통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더구나 투사는 감정과 함께 하기에, 강렬한 투사는 그만큼 강렬한 감정과 함께 하기에 말입니다. 그래서 말로 하지 않았다고 안심할 순 없습니다. 심지어 좋게 말했어도 안심할 순 없습니다. 말 말고, 말로 하는 소통 말고, 말투, 억양, 표정, 몸짓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동반된 감정의 크기만큼 감추고자 하는 조심성도 줄어듭니다. 더구나 상대는 이미 말이 아닌 것들을 읽어내는데 도가 통해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렇게 전 아이들에게 또 아내에게 제 그림자를 전가했었습니다. 제가 페르소나에 충실한만큼, 가정이란 울타리를 견고하게 만들려 했던 만큼, 현실에서의 욕망이 컸던만큼, 비록 제겐 교묘하게 숨겨왔지만 그만큼 짙은 어둠이 그들에게 드리위졌습니다. 그들은 그만큼 병들었습니다. 그만큼 깊게.
그러니 가족은, 아내와 아이들은 가장 가까운 거울입니다. 그들이 못마땅해 뵈는만큼 제 그림자는 그만큼 깊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그 깊이만큼 그들을 병들게 했습니다.
제 소중한 가족을 그렇게 아프게 했으니 그림자는 분명 악마입니다.
허나 동전이 양면을 갖듯, 극단은 서로 통하듯, 우로보로스가 제 꼬리를 삼키듯, 음양은 돌고 돌듯, 악마는 천사의 다른 이름입니다.
스스로를 보긴 쉽지 않습니다. 거울에 비친 저는 진짜 제가 아닙니다. 제 무의식에 묻힌 그림자입니다.
가만가만 바라보면 암순응이 된 제 동공은 벌어지고 처음엔 윤곽이, 차차 세세한 모습까지 눈에 들어옵니다. 동시에 햇살은 어두운 동굴로 스며들며 악마는 천사로 변신합니다. 그렇게 제 본래의 얼굴과 가면(페르소나)은 점점 닮아갑니다.
그렇다고 제가 천사는 물론 아닙니다. 이게 제 가면(페르소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