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과 1학년 때이다. 처음으로 정신과학을 배우던 때가 기억난다. 생소하기도 했거니와 교과서에 나와있는 질병마다 내용을 읽어가다 보면 전부 내 얘기였다. 난 정신분열증에, 조울증에, 불안증에, 강박증, 더구나 인격장애까지 모두를 두루두루 가진 종합 정신과 환자였다. 두려웠다. 그길이 내 길이 될 순 없었다.
그래도 인상에 남는 것이 있다. 남성의 무의식에 내재된 여성성?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물론 사람의 마음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었고 근친상간이니 리비도니 하는 프로이트 이야기는 망측스럽기까지 했던 때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아니마'란 단어엔 어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도 모를 끌림이 있었던 것 같다. 열어둔 창문 사이로 바람소리가 스산하다.
인턴 때는 신기하게도 일반 외과가 끌렸다. 응급실 당직을 할 때면 외상을 포함해서 응급 수술이 필요한, 촌각을 다투는 환자들을 능숙하고 단호하게 판단하고 살려내는 모습에 매료되었었다. 하지만 막상 평생을 그렇게 전투적으로 살아갈 자신은 없어졌다.
무난할 것 같은 과를 지원했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칠 즈음까지, 그러니까 다시 레지던트를 지원해야할 때까지정신과에 대한 두려움은 가시질 않았었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당시에 우리끼리 하던 말론 정신과를 선택하는 사람은 두 부류 중 하나라고들 했었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탐구심과 진정으로 마음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을 도와야겠다는 소명을 가졌거나 아니면 자기 문제를 해결해 볼 요량이거나.
당연히 내 경우는 후자였다. 종합 정신과 환자인 나를 고쳐봐야겠다는 용기가 생겼다고 할까? 절친했던 동기 둘이 정신과를 택해서 이미 수련을 마칠 즈음이라 그 친구들의 격려가 컷었다. 또 결혼 1년을 맞아가던 아내의 격려도 큰 힘이 되었었다.
생각해보면 이미 정해졌던 길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견고했던 두려움이 그리 쉽게 사라질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의대 진학부터도 그랬다. 예비고사가 끝나고도 의대는 내 계획에 없었다. 불과 한달 남짓한 사이에 정해졌다. 더구나 피를 보면 온 몸의 기운이 빠지면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증상마저 있어 그러고도 의사가 될 수 있을지 자문까지 받았으니. 물론 대학 생활 중에나 인턴 때까지 그렇게도 심각한 출혈장면을 많이 봤지만 신기할 정도로 문제는 되지 않았다. 심지어 일반외과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으니까.
진학을 하고보니 친구들은 어려서부터 질병으로 고통받는 분들을 돕겠다는 뜻을 세우고 오랫동안 준비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나처럼 그저 돈벌이와 신분상승을 노리던 아이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속물적 선택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대학시절 내내 많이도 나를 괴롭혔었다. 빚은 갚아야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의대진학도 정신과 선택도 계획엔 없던 것들이다. 물론 레지던트를 마치고 개원을 한 것도 또 지금 이곳에서 살고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실 정신과 수련을 하면서도 관심이 있던 것은 정신치료였다. 내담자와 함께 미지의 마음을 탐구해가는 과정은 세심함과 인내가 함께 요구되는 정말이지 매력적인 과정이었다. 하지만 현실을 생각하라는 익숙한 초자아의 목소리는 외면하질 못 했다.
개원을 하던 처음에 아내에게는 10년만 열심히 벌어서 다시 서울로 가자고 철석같은 약속을 했었다. 그래서 서둘렀다. 준비만 된다면 정신치료의 본고장으로 가서 공부를 해보리란 막연한 꿈을 꾸기도 했다. 선택한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모든 서두름엔 반드시 댓가가 있는 법이다. 나름 혹독한 댓가를 치렀다. 어쩌면 지금도 그 댓가를 치르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세월이 올해로 28년이다. 돌아보면 어리석기 한이 없다.
하지만 그래도 내 귀한 삶인 것을 어쩌랴. 댓가를 치르던 와중에 인지행동치료도, 명상도, 종교신비주의도 공부할 수 있었다. 융을 다시 생각해낸 것도 그맘때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내 문제는 해결되고 있질 않으니.
영어가 짧기도 하지만 특히나 융을 영어로, 더구나 독일어 원전으로 읽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부영 선생님이 계신 한국 융 연구원도 엄두가 나질 않았다. 번거롭고 귀찮은 것은 손도 대지 않는 성정 탓에 학회도 그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우리말로 번역된 융 학파의 책도 꽤 있었고 우리 나라 저자들의 책도 많아졌다. 쉬엄쉬엄 읽고 있다. 반 이상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도 못 한다. 다만 읽고 또 읽다보면 오해가 많겠지만 나름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눈에 띈다. 어디 융 뿐이랴? 이곳 스팀잇에서도 매한가지이다.
게으르게 나를 알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