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5학년이던 그해 초여름 쯤이었다. 정수는 며칠째 악몽에 시달렸다. 식은 땀으로 흠뻑 젖어 깨어나길 반복했다. 그날 아침 정수는 등교길에 학교 앞 문방구에서 도루코 면도날 두 개를 샀다. 곱게 가방 구석에 그것들을 찔러넣었다.
1교시를 마치고 정수는 명호를 불렀다. 점심 시간에 뒤 운동장에서 보자는 말을 했다. 명호는 기름기 흐르는 낯으로 웃음을 흘리며 '왜~~에? 그러지 뭐.'하며 이죽거렸다.
벌써 몇 달째 명호는 정수를 놀려먹고 있었다. 집적거리고 또 거기에 반응하는 정수가 재미있었던지 멈추질 않았다. '하지마!' 라고 하면 같은 말을 따라서 반복하고 반응이 없으면 옆구리를 찌르거나 툭툭 건드렸다. 팔이라도 책상의 경계를 넘어가면 연필로 찌르거나 발로 찼다.
그때는 나무로 만든 작은 책상 하나를 두명의 학생이 함께 썼다. 책상 한가운데엔 칼로 그은 경계선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여기를 넘어가면 분쟁이 벌어졌다. 수컷들에게 영역이 침범당하는 일은 참을 수 없는 일인 모양이다. 물론 서로는 대개 비슷한 상대였기 때문에 다툼이 있더라도 곧 언제 그랬냐싶게 어울리곤 했었다.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수 생각에 명호는 비슷한 상대가 아니었다. 수치스러웠다. 명호는 무엇보다 말로 정수를 우습게 만드는데 얄미울 정도로 그때 말로 도사였다.
그날 정수는 결심했다. 점심시간이 되고 미리 나가있던 정수 앞에 예의 그 이죽이는 표정으로 명호가 나타났다. 정수는 준비한 도루코 면도날 한 개를 명호에게 쥐어주고 자기도 한 개를 들었다. 그러면서 정수는 낮은 목소리로 '오늘 니가 죽던지 내가 죽던지 한 번 해보자.'라는 말을 했다.
정말이지 정수는 죽을 생각이었다. 죽는 것이 뭔지 잘 몰랐지만 두렵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불편했고 부끄러웠고 두려움에 분노를 누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비루해서 견딜 수 없었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결심을 하고나니 마음이 편안했다. 실제로 정수는 비장하다기 보다는 차분했고 편안했다.
헌데 생각지도 못 했던 정말로 놀라운 반전이 벌어졌다. 칼을 쥐어준 명호의 가랑이 사이가 축축해지더니 이 녀석이 힘 없이 앞으로 주저앉는 것이 아닌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며 말을 더듬었다. 명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수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날의 헤프닝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렇게 싱겁게 끝났다.
그렇다고 정수도 변한 것은 없었다. 여전이 말이 없고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정수가 봐도 그 행동은 과한 것이었다. 그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난리가 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 일로 칼을? 얼어죽게 그것도 한 개씩을 나눠서! 배운게 없거나 성격파탄자라면 모를까 무슨 서부 활극을 찍는 것도 아니고. 자칫하면 더 이상 학교 생활을 못 하게 됐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당시에 그 사건은 정수와 명호, 둘만의 비밀로 봉인되고 그렇게 끝났다.
가난은 불편하다. 사실이지 정말 불편하다.
창피해서 숨어들 곳을 찾게 된다. 말수가 줄어들고 시선은 딴 곳을 향하고 얼굴은 자주 붉어지고 표정관리가 안 된다. 거절을 못 하고, 나서야 할 때 나서질 못 하게된다. 매번 손해를 보는 것이 억울해진다.
하지만 두려움과 분노가 결합하면 피해의식이라는 생각지도 못 한 비약이 만들어진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어처구니 없음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