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는 이제 4학년이 되었다. 이미 전학을 두 번이나 해서 낯 익은 친구도 없었고 더구나 3월 초여서 아무래도 분위기는 서먹했다.
담임 선생님은 보이스카웃 단장이셨다. 몇몇 아이들처럼 정수도 입단 권유를 받았다. 원하는 아이들은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말끔한 곤색 단복이나 하얀색 로프를 말총처럼 늘어뜨린 허리 장식은 어린 정수의 넋을 빼놓을만 했었다. 그 바람에 대답을 망설인 것이 화근이었다.
며칠을 고민했다. 어린 가슴만 앓았다. 정수가 보기에도 적잖이 돈이 들어가야 했다. 부모님께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꺼내봐야 소용 없는 일인 줄 이미 잘 알고있었다. 가슴앓이를 한다고 가당키나 한 얘긴가? 결국 포기했다. 하고싶은 것이 한 두 가지였으랴만 이 일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만큼 포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가난은 '하고싶다고 다 할 수 있는게 아니'란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그 덕분인지 4학년은 유쾌하지 못 한 한 해였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뒤 쯤이었을 것이다. 미술 시간이 끝나갈 즈음, 선생님은 정수에게 '시 주최 미술대회'에 나가보자고 하셨다. 정수의 머릿 속으론 '환쟁이는 굶어 죽는다'던 엄마의 말씀이 스쳐갔다.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면 엄마는 그런 말씀을 하셨었다.
'엄마가 그러시는데 환쟁이는 굶어 죽는대요.' 그순간 정수가 뱉어낸 말이었다.
그 당시 선생님의 표정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순간 압도적인 부끄러움이 엄습했다. 그것만은 지금도 또렷히 기억된다. 몸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얼굴은 화끈거리고 몸은 감전된 것 같았다. 쥐구멍이 있었다면 숨어들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린 정수에게 미술대회는 환쟁이로 가는 길이었고, 이는 곧 가난이었다. 그렇게 생각할만 했다. 가난이 싫기도 했지만 정작 부끄러운 것은 부모님이었던 모양이다. 헌데 정수는 고만큼만 영악했다.
그 어설픈 영악은 발설되면 안되는 것을 통제하지 못 하고 말았다. 그 순간, 부모님의 밑천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하필 조용하던 그 시간에, 또 어쩌면 모두가 선망의 눈으로 귀를 세우고 있던 그 순간에.
그때부터 부끄럽기 시작했다. 드러나야 부끄럽다. 비록 부끄러워도 숨기고 있을 순 있다. 아닌 척 할 순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드러난 때 그러고 있을 순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숫기가 없는 정수는 그날 이후로 더욱 말이 없어졌다. 당시 서울 변두리의 국민학교는 한 학급이 백명에 육박했다. 마음만 먹으면 투명인간이 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 보다 쉬웠다. 정수는 그렇게 지냈다.
가난이 불편한만큼, 그래서 채워지지 않는 욕심이 큰 만큼, 그 불편을 만든 누군가에 대한 원망도 커진다. 그 원망은 어린 마음이어도 가져선 안되는 것이다.
원망은 안으로는 죄책감을 남긴채 어둠에 묻혀 버리고 바깥으론 수긍할 수 있는 교양, 문화적 소양, 혹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학력으로 투사된다. 여기서 지적 허영이 싹트고 있었다.